항목 ID | GC043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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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振興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창래 |
설립 시기/일시 | 1932년 10월 - 양주진흥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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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양주진흥회 -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
성격 | 농민 단체 |
설립자 | 송문화[양주군수] |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지역에 있었던 농촌 지도 단체.
농촌진흥회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관료-유지 지배 체제의 형성과 함께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발전시킨 주요 기구 중 하나이다. 양주진흥회도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의 가혹한 수탈에 대항하는 기구로서가 아니라 단지 지주와 소작인 간의 상호 부조와 농민의 자력갱생 등을 요구하는 기구로서 만들어졌다.
일제는 강점과 함께 조선을 식량·원료 공급 기지로 삼아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고 식민지 지주제를 확대 발전시키면서 농촌 사회를 장악해 나갔다. 이후 20년간 식민 통치와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 및 1930년 전후의 공황 여파로 조선의 농촌 경제가 파탄에 직면하자 농민 조합 운동 및 농촌 계몽 운동이 확산되었다. 일제는 이에 대응하는 농촌 진흥 운동을 시작하면서 파탄에 직면한 농가 경제 안정을 위해 ‘식량 충실, 현금 수지 균형, 부채 근절’을 갱생 3목표로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직으로 농촌진흥회가 결성되었다.
1920년대 이후 속출했던 사회단체 중의 하나가 농민 단체였다. 전국적인 농민 단체는 1921년에 세 개에 불과했으나 1923년에 107개, 1927년에 160개, 1930년에 943개로 그 수가 급증하였다. 이는 1920년 이후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에 따라 경제적 수탈이 농촌에 집중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양주 지역에서도 농촌진흥회, 양주청년회 등 7개의 청년 단체가 있었다.
1930년대 일제의 조선 농촌 진흥 운동[1932~1940] 시책에 따라 양주 지역의 진흥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농가 경제 갱생’의 전략으로 ‘각 면마다 1개 지도 마을을 선정하여 5개년 간 식량 충실·현금 수지 개선·부채 정리 등 갱생 3목표를 연차적으로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독려하기 위한 실행 조직과 지도 조직으로 중앙과 지방에 농촌진흥위원회를, 자연 촌락에 농촌진흥회를 각각 결성하기로 하였다.
양주진흥회는 양주군 16면 148리 가운데 최소 20호, 최대 70호 단위 마을로 구성했으며, 450개 마을에 걸쳐 조직이 구성된 연합 기구였다. 1932년 10월 22일 양주진흥위원회 위원장 송문화 양주군수 이하 각 위원들이 각 면을 순회하며 각 리 구장은 물론 유력자들을 소집한 후 취지 홍보와 조직 구성을 추진하여 11월 중순에 이르러 농촌진흥회 조직이 완료되었다.
농촌진흥회의 초기 실행 사항으로는 국기 게양과 마을 청결, 자급 비료 증산 증식 등이 하달되었으며, 각 부락회는 생활 개선 등 수십 개 조항을 정하여 자체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다. 양주군 산하 16개 농촌진흥회에서는 영농비를 절약하고, 작업 중에 음주도 금지했으며, 농한기를 이용하여 겨울 야학회도 열었다. 야학회에서는 주민들에게 조선어와 계수법 등을 가르쳐 문맹 퇴치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색옷 착용 등 생활 개선을 위한 강습회 및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1937년에는 연하장의 폐지도 결의했으며, 1939년에는 양력 과세(陽曆過歲) 운동을 실시하여 군내 각 면의 진흥회와 각 호마다 연락하고 실행을 독려하였다. 이후 형식적인 모임과 망년회 및 신년회 행사 폐지와 함께 의복의 낭비를 줄이고 연초의 휴업일을 5일까지로 제한하도록 하는 등 극도의 비용 절약과 저축을 요구하는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리고 자급 비료의 증산과 농비 절약, 도박 자제와 음주의 대폭 축소, 전가족의 노동 참여, 농주(農酒)와 간식 폐지 또는 절약 등을 통해 생활 개선의 성과가 일부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진흥회 조직을 통해 협업 생산을 도모한 전동진흥회는 회원들이 금융 조합으로부터 저리 대출로 토지를 구입하여 공동 경작하면서 증산 활동과 기금 저축도 추진하였다. 장흥면 장안농촌진흥회에서는 추렴된 기금으로 1934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에 야학당을 짓고 보통학교 교원과 연계하여 문맹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육 사업도 펼쳤다.
경기 지역에서 일제가 가장 강력하게 활동을 전개했던 기구로서 일제 강점기 양주 지역에 대한 침략 지배 정책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조직이다. 농촌 진흥 운동과 농가 경제 갱생 계획은 농민들의 희생적 노력만 요구할 뿐 조선 농촌의 가장 주요한 모순이었던 식민지 지주제라는 착취 구조를 개혁하는 방안은 모색되지 않았다. 마을 단위로 구성되어 농촌의 발전을 위한 조직체로서 활동하게 했으나 식민 지배 체제 강화를 위한 시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극도로 침체된 농촌 생활의 수준 향상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