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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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克愊 |
이칭/별칭 | 자성(子誠),평정(平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472년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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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89년 - 진사 |
활동 시기/일시 | 1498년 - 식년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 정자, 홍문관 수찬, 춘추관 기사관 |
활동 시기/일시 | 1503년 - 지평 |
활동 시기/일시 | 1504년 - 예조 정랑, 갑자사화로 고산현에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511년 - 승정원 동부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13년 - 박영문의 옥사를 다스림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좌참찬 |
활동 시기/일시 | 1525년 - 좌찬성 |
몰년 시기/일시 | 1531년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38년 - 김안로 일파의 몰락 후 복권됨 |
추모 시기/일시 | 1559년 - 신도비 건립 |
유배|이배지 | 고산현 - 전라북도 완주군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마전로 118번길[마전동 산65]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마전로 118번길[마전동 산65]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좌찬성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성(子誠). 증조할아버지는 김문(金問)이며, 할아버지는 감찰 김철산(金鐵山), 아버지는 좌리공신 좌참찬 김겸광(金謙光)이다. 어머니는 중군 사직(中軍司直) 진계손(陳繼孫)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극핍(金克愊)[1472~1531]은 1489년(성종 20) 진사가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검열, 전적,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뽑혀 경연 검토관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1503년(연산군 9) 지평에 올라 언론 활동을 벌이다 부사직으로 좌천되었으며,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엮여 고산현(高山縣)[현 전라북도 완주]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어 홍문관 교리에 천거되었고 장령과 부응교, 예빈시 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승문원 교감과 사간, 집의, 제용감 정 등을 거쳐 1511년(중종 6)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승문원 교감 재임 시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첨지중추부사, 호조 참의를 거쳐 좌승지를 지낼 때는 박영문(朴永文)의 옥사를 다스렸다.
충청도 관찰사, 한성부 윤,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 14) 개정가계사은사(改正家系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참찬에 제수되었으며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광옥군 겸 판의금부사 지춘추관사(純忠補祚功臣崇祿大夫光獄君兼判義禁府事 知春秋館事)에 증직되었다.
형조판서, 대사헌, 이좌 판서·호조 판서 겸 세자좌빈객 등을 거쳐 1525년(중종 20) 좌찬성에 올랐다.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허항(許沆) 등의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당하자 분한 마음에 단식을 하다 1531년(중종 21)에 세상을 떠났다.
김극핍은 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말년에 자녀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비록 덕이 모자라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늙어서도 한결같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낼 때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남을 그릇되게 한 적이 없으며, 형법관일 때 역시 죄를 더하거나 줄인 일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의 말을 명심하여 바르게 살라.”고 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마전동 산68번지에 있다. 부인과의 쌍분으로 주변에 묘갈과 상석, 장명등, 문인석, 신도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1538년(중종 38)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뒤 복권되었다. 1559년(명종 14) 세워진 신도비는 숭정대부 정사룡(鄭士龍)이 글을 짓고, 오촌 조카 가선대부 김개(金鎧)가 글씨를 썼다. 뒷면에는 선영기(先塋記)가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