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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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樂莘 |
이칭/별칭 | 경윤(景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815년 5월 18일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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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36년 - 남선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58년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861년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862년 - 고금도에 유배됨 |
활동 시기/일시 | 1863년 - 고향으로 옮겨짐 |
활동 시기/일시 | 1865년 - 풀려남 |
활동 시기/일시 | 1866년 - 영종진 첨절제사 |
활동 시기/일시 | 1877년 - 평안도 병마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887년 4월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97년 - 묘갈 건립 |
유배|이배지 | 고금도 -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
묘소|단소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수원 |
대표 관직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경윤(景尹). 고조할아버지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백사밀(白師謐), 증조할아버지는 내승무과에 추천되어 경상 수군절도사를 지낸 백동의(白東毅)로,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백윤진(白崙鎭), 아버지는 영종 방어사와 가선대부를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된 백형수(白珩洙)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진사 이정은(李正殷)의 딸이며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후손이다. 3남 3녀 중 백낙신(白樂莘)이 큰아들이다. 남동생은 백낙영(白樂榮), 가선대부 백낙훈(白樂薰)이다. 백낙훈은 삼종숙[아버지의 팔촌] 백최수(白最洙)의 양자로 들어갔다.
첫째 부인은 정부인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훈련원정 이규동(李奎東)의 딸이며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이다. 사위는 병사 이민응(李敏應), 목사 오윤영(吳胤泳), 병사 이규증(李奎曾)이다. 둘째 부인은 정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학생 이재우(李在宇)의 딸이다. 측실에서 낳은 딸은 학관(學官) 양주겸(梁株謙)에게 출가하였다. 아들이 없어 조카 백남승(白南昇)을 양자로 들였다.
[활동 사항]
백낙신[1815~1887]은 1836년(헌종 2) 남선무과(南宣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판관, 도총의 경력을 겸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개천군(介川郡) 수령을 지내고 경상병 우후(慶尙兵虞侯)로 승진하였다.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함흥 중군(咸興中軍)에 임명되었다. 1851년(철종 2) 부친상을 마친 후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다.
1858년(철종 9)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861년(철종 12)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어 약 1만 5000석[4만 5000냥 상당]의 쌀을 수탈하였고, 진주목(晋州牧)의 관리들이 횡령한 2만 8000여 석에 대한 도결(都結)[구실아치들이 세금으로 거둔 돈과 베를 빼돌리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또 세금을 물림]을 징수하였다. 경상우병영에서는 환포(還浦) 2만 4000여 석을 한꺼번에 내게 하였다. 이에 1862년(철종 13) 2월 18일 유계춘(柳繼春), 김수만(金守滿), 이귀재(李貴才)의 주동으로 진주 백성들이 봉기하였다. 이 사건이 진주 민란으로, 30여 곳에서 일어난 임술민란의 신호탄이 되었다. 백낙신은 2월 19일 아침 성난 백성들을 달래려다 농민군에게 붙들려 이튿날까지 끌려다녔지만 폭행을 당하지는 않았다.
조정에서는 진주 안핵사 박규수(朴珪壽)와 경상우도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 등의 청을 받아들여 백낙신의 재산을 몰수하고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로 귀양 보냈다. 1863년(고종 즉위년) 7월 고향으로 옮겨졌다가, 1865년(고종 2) 풀려났다. 이듬해 영종진 첨절제사(永宗鎭僉節制使)가 되어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경기중군(京畿中軍)을 겸하여 영종진과 행주를 방어하였다. 1877년(고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파견되었다가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아 1885년(고종 22)에 다시 유배되었다. 1887년(고종 24) 4월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97년(고종 34) 2월 동생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 백낙훈이 쓴 묘갈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