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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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鐸 |
이칭/별칭 | 선명(善鳴),약봉(藥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정덕 |
출생 시기/일시 | 1509년 - 이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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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31년 - 사마시 진사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35년 - 별시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 |
활동 시기/일시 | 1541년 - 승문원 박사, 성균관 전적 |
활동 시기/일시 | 1544년 - 형조 정랑, 성균관 직강, 병조 정랑, 사헌부 지평 |
활동 시기/일시 | 1545년 - 대동도찰방 |
활동 시기/일시 | 1547년 - 의정부 검상, 사인 |
활동 시기/일시 | 1548년 - 사헌부 집의, 사재감 첨정 |
활동 시기/일시 | 1551년 - 종부시 의정 겸 춘추관 편수관 홍문관 전한, 직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동부승지, 첨지중추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진헌사로 중국에 다녀옴. 홍문관 부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도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59년 - 황해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62년 - 공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65년 - 대사헌, 이조 참판, 공조 판서, 호조 판서,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병조 판서,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 이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69년 - 판중추부사, 병조 판서, 지돈녕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71년 - 우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판중추, 영중추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관상감 사 |
몰년 시기/일시 | 1576년 - 이탁 사망 |
묘소|단소 | 이탁 묘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의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선명(善鳴), 호는 약봉(藥峰). 현조할아버지는 한성 윤 이구(李龜)이고, 고조할아버지는 형조 정랑 이직간(李直幹), 증조할아버지는 현감 이굉식(李宏植), 할아버지는 현감 이맹희(李孟禧)이며, 아버지는 군수 이창형(李昌亨)이다. 어머니는 박유(朴維)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탁(李鐸)[1509~1576]은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중종 30) 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벼슬을 받아 저작(著作), 예문관 검열을 거쳐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임관을 앞둔 1536년(중종 31) 아버지가 죽고, 2년 뒤인 1538년(중종 33)에 어머니도 죽어 삼년상이 끝난 뒤인 1541년(중종 36)에 승문원 박사가 되었고, 전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품계가 올랐다.
승문원교검, 공조 좌랑·예조 좌랑·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1544년(중종 39)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성균관 직강, 병조 정랑,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1545년(인종 원년)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나가서는 역마(驛馬) 관리에 힘써 역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였다. 얼마 후 병조 정랑을 거쳐 이조로 옮겼다가 1547년(명종 2) 의정부 검상에 천거되었으며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1548년(명종 3) 사헌부 집의 재임 중 좌천당해 사재감 첨정으로 벼슬이 바뀌었다. 홍문관 교리, 응교를 지낸 후 파직당했다가 얼마 뒤 성균관 학관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종부시 첨정, 1551년(명종 6) 종부시 의정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홍문관 전한, 직제학, 1552년(명종 7) 승정원 동부승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1553년(명종 8) 진헌사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해 가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겼다. 그 무렵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을사사화를 주도한 윤원형(尹元衡)이 첩을 본처로 삼고, 서자[첩의 아들]를 차별하는 제도를 없애려고 하였다. 대사헌 윤춘년(尹春年)까지 여기에 동조하니, 아무도 드러내 놓고 반대를 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탁이 나서서 윤원형의 나쁜 행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1554년(명종 9) 승정원에 들어가 이듬해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가 되었다. 병으로 벼슬을 바꾸어 장예원 판결사, 사간원 대사간, 공조 참의·예조 참의·호조 참의·이조 참의를 지냈고, 1558년(명종 13)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1559년(명종 14) 황해도에 임꺽정을 우두머리로 한 도적 떼가 들끓자 임금의 특명으로 황해도 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이탁은 부임지에서 도적을 쫓는 대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힘썼고, 얼마 후 도적 떼는 스스로 흩어져 버렸다.
1년도 안 되어 병으로 서반(西班)으로 옮겨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공조 참판을 지냈다. 청홍도(淸洪道)[지금의 충청도]를 시찰하고 와서는 다시 병이 도져 벼슬을 바꾸었다. 이조 참판, 대사간,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겸 성균관 동지를 거치면서 여러 번 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대사헌은 다섯 차례, 이조 참판은 두 차례 재임하였다.
1565년(명종 20) 대사헌으로 있을 때 윤원형의 횡포가 극에 달해 비난과 원망이 빗발치자 이탁은 대사간 박순(朴淳)과 더불어 관료들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아가 윤원형을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의정부를 포함하여 온갖 부서에서 윤원형을 탄핵하니 그제서야 임금은 윤원형의 벼슬을 빼앗고 고향으로 쫓아 보냈다. 같은 해 이조 참판, 공조 판서, 호조 판서,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대사헌을 지냈다.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568년(선조 원년) 병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 이조판서가 되어 자목(字牧) 시정 개혁을 실시하였고, 이듬해 사임하여 벼슬이 바뀌었다. 판중추(判中樞)를 거쳐 병조판서, 지돈녕부사, 이조판서, 판중추에 이어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두 번씩 거쳤다. 1571년(선조 4) 우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에 제수되었다.
1572년(선조 5) 봄 병으로 사직하려고 하자 임금이 사관을 통해 전의와 약을 보내 만류하였다. 그래도 사직을 허락해 달라는 글을 아홉 번이나 올리니 임금은 “나라를 돕는 그대의 마음이 관직에 없다고 달라지겠는가. 이제 어쩔 수 없이 사의를 받아들인다.”라고 하였다. 추부(樞府)[중추부]로 옮겨 판중추 및 영중추를 맡은 뒤 1573년(선조 6)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관상감사에 제수되었다. 이탁은 다시 열한 번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린 끝에 임금의 윤허를 받아 판중추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병이 깊어 1576년(선조 9) 정월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에 무덤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숙(貞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