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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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由謙 |
이칭/별칭 | 숙양(叔讓),소간(昭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정덕 |
출생 시기/일시 | 1456년 - 임유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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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80년 - 사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89년 - 대과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 |
활동 시기/일시 | 1506년 - 동지중추부사로 중국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예조 참판, 호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
활동 시기/일시 | 1514년 - 경기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형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20년 - 세자 우빈객 |
몰년 시기/일시 | 1527년 4월 24일 - 임유겸 사망 |
묘소|단소 | 임유겸 묘 - 경기도 양주시 율정동 273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풍천 |
대표 관직 | 형조판서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숙양(叔讓). 증조할아버지는 임중선(任中善)이고, 할아버지는 임효돈(任孝敦), 아버지는 임한(任漢)이다. 어머니는 홍심(洪深)의 딸이다. 부인은 청단 찰방(靑丹察訪) 이신(李愼)의 딸이다. 아들은 임추(任樞), 임권(任權), 임병(任柄), 임건(任楗), 임간(任幹)이다. 손자는 임호신(任虎臣), 임보신(任輔臣), 임중신(任重臣), 임수신(任壽臣), 임례신(任禮臣), 임익신(任翊臣)이며, 증손자는 임광(任絖)이다. 후손들이 모두 높은 벼슬을 하여 풍천 임씨 가문을 빛냈다.
[활동 사항]
임유겸(任由謙)[1456~1527]은 1480년(성종 11)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489년(성종 20)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전례에 따라 박사가 되어야 하나 정원 외 벼슬인 검교로 사헌부 감찰 벼슬을 받았고,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혀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에 이어 교리로 승진, 병조 정랑이 되었다.
임유겸이 홍문관 부응교로 있을 때 길에서 세도를 부리는 권신(權臣)을 만나자 말을 끌어서 피하였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나중에 복직되었으나 연산군(燕山君)에게 밉보여 무반의 말단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발령이 났다. 훈련원 첨정을 마지막으로 약 7년 동안 한직(閑職)을 돌았을 뿐 현관(顯官)[널리 알려진 높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이로 인해 연산군 말년의 폭정에는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1506년 중종 즉위 후 동지중추부사로 청승습사(請承襲使)[후계왕의 즉위를 요청하는 사신]를 겸하여 중국에 다녀왔고, 1507년(중종 2) 예조 참판, 호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으며, 1514년(중종 9)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임기를 마친 후 한성부 윤, 호조 참판을 지냈다. 1516년(중종 11)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형조판서가 되었고,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를 지냈다. 1520년(중종 15) 세자 우빈객을 겸하였으며, 1523년(중종 18)에는 형조까지 맡았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세자 빈객 자리만 거둬들였다. 이에 다시 사표를 내 지중추로 옮겼다. 이후 병이 깊어져 1527년(중종 22) 4월 24일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유겸은 소박한 것을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더욱 사치를 멀리하였다. 동산에 작은 집을 지어 그곳에서 휘파람을 불고 글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함께 바둑이나 투호(投壺)를 하였다. 그림을 그려서 지인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명절에는 자녀, 조카, 친구를 대동하고 아름다운 산과 강을 유람하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고는 하였다. 나이든 재상들과 교유하며 기로십일(耆老十一)이라는 계(契)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칠로회(七老會)라고 불렀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율정동에 무덤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소간(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