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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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矩 |
이칭/별칭 | 설학재(雪壑齋),중상(仲常),정절(靖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창래 |
[정의]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의정부에 묘소가 있는 여말 선초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 자는 중상(仲常), 호는 설학재(雪壑齋). 아버지는 감찰 대부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양생(鄭良生)이다. 어머니는 찬성 안축(安軸)의 딸 순흥 안씨이다. 첫째 부인은 참의 이인(李嶙)의 딸 고성 이씨이고, 둘째 부인은 좌윤 윤승경(尹承慶)의 딸 파평 윤씨이다. 아들은 정효경(鄭孝卿), 정선경(鄭善卿)이며, 손자는 정종(鄭種), 정비(鄭秠)이다.
[활동 사항]
정구(鄭矩)[1350~1418]는 1377년(우왕 3) 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 좌간의대부를 지냈으며, 1382년(우왕 8) 김극공(金克恭)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한성부 우윤에 올랐고, 1394년(태조 3) 왕명으로 왕씨(王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예의 판서 한리(韓理), 봉상경(奉常卿) 조서(曺庶), 헌납(獻納) 권홍(權弘), 사복시 주부 변혼(卞渾) 등과 『법화경(法華經)』 4부를 금물[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로 베껴 썼다.
1397년(태조 6) 좌간의대부, 이듬해 정안군(靖安君)[태종]의 막료로서 판교서 감사(判校書監事) 겸 상서원 소윤(尙瑞院少尹)이 되었고, 승지 겸 상서원 윤을 지냈다. 1400년(정종 2) 승정원 도승지, 대사헌, 1401년(태종 1) 예문관 학사, 중군 총제(中軍摠制), 1407년(태종 7)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공조 판서·호조 판서, 이듬해 예조판서,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1412년(태종 12) 계림부 윤(鷄林府尹), 1414년(태종 14) 개성부의 유후사 유후(留後司留後), 1416년(태종 16) 공조 판서, 의정부 참찬을 역임하였다. 1417년(태종 17) 의정부 참찬으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홍무(洪武) 연간인 1368~1398에 건강(建康)[난징]에서 제작된 각궁(角弓)을 구입해 가져왔다. 그해 의정부 찬성이 되었으나 풍병으로 사직하고 1418년(태종 18) 세상을 떠났다. 예서·초서·전서를 잘 써 이름이 높았고, 성품은 청렴하였으며 예의가 발랐다.
[학문과 저술]
1409년(태종 9)에 건원릉 신도비(建元陵神道碑)의 전액을 썼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능이다. 정구의 시인 「송산유거(松山幽居)」 한 편이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필문전일노송(蓬蓽門前一老松)[사립문 앞 소나무 한 그루]
백년춘우양염용(百年春雨養髥龍)[백년 봄비 맞아 용이 되었소]
모천상설매궁학(暮天霜雪埋窮壑)[저문 하늘 눈서리에 산골짝에 묻혔어도]
간취정정특수용(看取亭亭特殊容)[정정한 그 모습 특출하여라]
[묘소]
정구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어룡동(魚龍洞)에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8세손 정기(鄭耆)가 꿈을 꾸고 나서 묘를 찾고 재실도 지었다고 한다. 1977년 도시 확장에 따라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산단로 68번길 32]으로 산소를 옮겼고, 2002년 새로 재실인 송산재(松山齋)와 숭정사(崇靖祠)를 지어 정구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정선경과 정효경을 배향하였다.
[상훈과 추모]
1418년(태종 18) 정절(靖節) 시호를 받았다. 태종은 시호를 내리면서 ‘송산일발(松山一髮)/ 수양동흘(首陽同屹)/ 도덕문장(道德文章)/ 백세사표(百世師表)[아득한 송산은 수양산처럼 우뚝하게 솟아 있구나. 만고의 충절이 어찌 백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맑고 밝은 자연 풍경은 정공의 품은 뜻이요, 그의 도덕심과 문장은 백세도록 스승이니라.]’라고 쓴 치제문(致祭文)을 하사하였다. 후에 사림(士林)에서 정구의 절의를 받들어 양주, 안의, 성주, 거창에 사당을 세웠다.
고려 말 양주[지금의 의정부시 민락동 삼귀마을]에 정구를 비롯하여 송산(松山) 조견(趙狷)[1351~1425], 원선(元宣) 등 세 사람이 들어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 절개를 기리기 위해 1789(정조 13) 사당을 짓고 삼귀서사(三歸書祠)라 하였다. 이후 1804년(순조 4) 사당 이름을 송산사(松山祠)로 고쳤다.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에 있는 반암서원(盤岩書堂)에서는 정구와 아들 정선경, 손자 정종, 정비를 배향하고 있다. 본래 정구는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와 함께 1777년(정조 1) 정충사(靖忠祠)에 모셔졌으나 1794년(정조 18) 다른 사람을 추향하게 되어 그해 9월 위패를 옮기고, 이름도 반암서원으로 바꾸었다.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다시 지어 반암서당(盤巖書堂)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4년에 증축한 것으로, 앞쪽에 강당인 반암서당이 있고 뒤쪽에 사당인 세덕사(世德詞)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墓)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양원마을에 있는 동래 정씨 마을 어귀에는 “정구가 고려 말 이후 이주한 이래 동래 정씨 동성이 모여서 이루어진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