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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56
한자 趙狷
이칭/별칭 거경(巨卿),송산(松山),조윤(趙胤),종견(從犬),평간(平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조태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51년연표보기 - 조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03년연표보기 - 평성군에 책봉
몰년 시기/일시 1425년 5월 3일연표보기 - 조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25년연표보기 - 시호를 받음
묘소|단소 조견 선생 묘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사당|배향지 정절사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송산사 -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평양
대표 관직 판우군도총제부사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사당이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가계]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경(巨卿), 호는 송산(松山). 초명은 조윤(趙胤).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덕유(趙德裕)이고, 어머니는 오의(吳懿)의 딸이다. 형은 조선 왕조 창건에 공을 세운 영의정부사 조준(趙浚)이다. 조윤은 고려가 망하자 자를 종견(從犬)으로, 이름은 조견(趙狷)으로 바꾸고 은거하였다고 하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벼슬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활동 사항]

조견(趙狷)[1351~1425]은 고려 말 여러 절의 주지를 지내고 30세가 넘어서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하자 상장군으로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394년(태조 3) 경상도 도절제사, 1397년(태조 6) 지중추원사, 1400년(정종 2)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를 지냈다. 1402년(태종 2) 도총제(都摠制) 재직 중에 사은사가 되었으나 중국 여행길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병을 핑계로 사퇴하였다. 이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박탈당하고 축산도(丑山島)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403년(태종 3) 좌군 도총제가 되었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태종 7) 충청도 도절제사 겸 수군 도절제사를 거쳤다. 이듬해 딸이 명나라 공녀로 뽑혀 가는 것을 저지한 일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410년(태종 10) 봉안사(奉安使)가 되어 태조의 진영(眞影)을 완산부(完山府)[전주]에 봉안하였다. 1419년(세종 1) 판우군도총제부사를 지내고, 1421년(세종 3) 3월 23일 궤장(几杖)[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내리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받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425년(세종 7) 5월 3일자 『세종실록(世宗實錄)』 평성부원군 조견의 졸기에는 “조견이 죽자 조회를 쉬고, 임금이 부조를 하였으며 관청에서 장사를 치러 주었다. 시호를 평간(平簡)이라 하니, 다스려서 잘못이 없는 것이 평(平)이요, 화평하고 온순하여 시비가 없는 것이 간(簡)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평양 조씨 족보와 문중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견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두류산[지리산]에 은거하다가 청계산(淸溪山)으로 옮겼고, 태조가 친히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종조견이 죽자 문무관인에게 3일 동안 검은 띠를 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묘소]

무덤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번지에 있다. 2001년 2월 20일 성남시 향토 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평간이다.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정절사(旌節祠)와 의정부시 민락동 송산사(松山祠)[경기도 기념물 제42호]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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