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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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澱 |
이칭/별칭 | 언침(彦沈),양포(楊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567년 - 최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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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5년 - 진사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88년 - 최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11년 - 묘갈 건립 |
묘소|단소 | 최전 묘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봉암길 33[봉암리 199-1] |
성격 | 유생 |
성별 | 남 |
본관 | 해주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유생.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언침(彦沈), 호는 양포(楊浦). 아버지는 위원군수 최여우(崔汝雨)이고, 어머니는 상주 이씨(尙州李氏)다. 아들은 승지 최유해(崔有海)이다.
[활동 사항]
최전(崔澱)[1567~1588]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6세 때 아버지를 잃고 큰형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9세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4세 때 사마시의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뛰어난 문장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으나 회시(會試)에는 때마침 스승인 이이가 시험 감독관 및 채점관이어서 오해를 살까 봐 응시하지 않았다. 1585년(선조 18)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전은 시문(詩文)과 그림, 글씨에 두루 뛰어났으며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특히 시를 잘 지어 당나라 소동파(蘇東坡)에 버금간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림은 매화와 새를 잘 그렸고, 글씨는 예서와 초서에 능하였다. 최전의 시문은 명나라에서 책으로 간행되어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8세에 「노마(老馬)」라는 시를 지었고, 12세에 「별해고졸오음(別海皐倅梧陰)」을 지었다. 이 시는 이이를 찾아가던 길에 황해도 연안에서 수령 윤두수(尹斗壽)에게 건넨 답시로, 이별하는 마음이 격조 있게 표현되었다. 그밖에 「제경포이수(題鏡浦二首)」·「유풍악산(遊楓嶽山)」 등 관동 지방의 경치를 읊은 시가 전해 오고 있다. 저서로는 『양포유고(楊浦遺藁)』가 있다. 이 책은 아들 최유해가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이정구(李廷龜)[1564~1635]와 신흠(申欽)[1566~1628]이 쓰고,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발문을 지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199-1번지에 묘소가 있다. 양주시 남면에서 지방도 364호선을 따라 동두천 방향으로 가다가 시군 경계를 넘기 직전 왼쪽의 낮은 능선 위에 위치한다. 묘는 쌍분에 묘갈, 문인석 등 옛 석물을 갖췄다. 1611년(광해군 3) 세워진 묘갈은 팔작지붕형 옥개석을 갖춘 1면 비다. 크기는 옥개석이 너비 97㎝, 두께 59㎝, 높이 30㎝이고, 비신은 너비 57㎝, 두께는 12.5㎝, 높이 123㎝이다. 비좌는 너비 102㎝, 두께는 60㎝, 높이 45㎝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 차림으로 총높이가 149㎝이다. 비문은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돈녕부사 김현성(金玄成)이 썼으며, 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이 전(篆)하였다. 최전의 묘 아래에는 아들 최유해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