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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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炳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환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윤병구(尹炳球)[1880~1949]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윤병구는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며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들 간의 친목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1903년 8월 예수교 감리교도인 홍승하·박윤섭(朴允燮)·문홍섭·임치성·임형주·김정극·안정수·이교담 등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동족 간의 단결, 민지(民智)의 계발(啓發), 국정 쇄신을 부르짖으며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고 행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듬해에 미국인 협잡배들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이민 교포들을 상대로 부당한 이민 경비를 받으려는 행태에 전면적으로 반대 투쟁을 벌이며 이주 동포들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윤병구는 하와이 오아후 섬의 에와농장에서 다시 정원명·김성구·이만춘·김규섭·강영소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에와친목회를 발족하고 정원명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어 항일 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친목을 도모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중에도 1905년 7월에 미국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의 포츠머스 강화 회의가 개최되자 에와친목회는 로스앤젤레스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한국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때 대표로 윤병구가 파견되어 국권 수호를 위한 외교 활동을 하였다.
1910년 군소 단체로는 대외적인 위신을 내세울 수 없음을 깨달은 각 단체의 지도자들은 군소 단체의 통합을 전개하였다. 결국 1910년 2월 1일에 재미 한인 단체를 통합하여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이 재미 한인 교포 자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발족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중앙 총회 사무소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각지에 지방 총회와 지방회를 두었다. 대한인국민회는 부속 기관으로 경찰도 두었으며, 지방 분권제인 대의원제를 택하여 각 지방에서 선출한 대표의 회의인 중앙 총회에서 대한인국민회 전체를 운영하였다. 당시에 윤병구는 박상하·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 지방 총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 연합 대회에서는 임시 정부를 대표하여 연합국의 강화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윤병구를 비롯하여 송헌주(宋憲澍)·김호(金乎) 등 재미 인사 9명을 지명하였다. 1920년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당선되어 부회장으로 당선된 백일규(白一圭)와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이끌었다. 당시의 회원은 약 4,000명가량이었으며 의무적으로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대한인국민회를 운영하였고, 상해(上海)에 있는 임시 정부에서 매년 2천불 내지 3천불을 지원하였다.
1921년 대한인국민회가 경비난을 겪게 되자 회장직을 사임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는 자동으로 해체되었다. 미주 지역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45년 4월 이승만·임병직 등과 함께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 정부 대표단으로 선발되었다. 1949년 6월 2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