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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73
한자 趙時元
이칭/별칭 조용원(趙鏞元),호일(胡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4년 10월 23일연표보기 - 조시원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상해남방대학 부속 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상해남방대학 역사사회학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0년 2월연표보기 - 상해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정치문화부장·선전조직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9년연표보기 - 다물단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화랑청년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한국문원』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33년연표보기 - 한국독립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진광』 발행
활동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한국독립당 중앙상임위원·비서부장·조직부장·선전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0월연표보기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임시의정원 의원
활동 시기/일시 1940년 9월 17일연표보기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2년연표보기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법무처장·정훈처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군법실장·광복군 정령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6년연표보기 -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50년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에서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
몰년 시기/일시 1982년 7월 18일연표보기 - 조시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지도보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214]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광복군 총사령부 법무처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조용원(趙鏞元), 호는 호일(胡逸). 단종 때 생육신인 조려(趙旅)의 17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성룡(趙成龍), 아버지는 조정규(趙禎奎)이다.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형은 조용하(趙鏞夏)·조소앙(趙素昻)·조용주(趙鏞周)·조용한(趙鏞漢)이고, 누나는 조용제(趙鏞濟)이다.

[활동 사항]

조시원(趙時元)[1904~1982]은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관보 및 『독립신문』 편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수배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4년 상해남방대학 부속 중학교(上海南方大學附屬中學校)를 졸업하고, 상해남방대학(上海南方大學) 역사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김무정(金武亭)·조한용(趙漢用)·허열추(許烈秋) 등과 함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하여 정치문화부장 겸 선전조직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8년 상하이에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집행위원회 정치문화부 및 선전조직부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한커우[漢口]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 창립총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만주로 가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군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 아래에서 동만청년동맹(東滿靑年同盟)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고, 1929년에는 베이징[北京]으로 가 다물단(多勿團)에 가담하여 친일 분자를 숙청하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화랑청년회(花郎靑年會)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겨울 월간지 『한보(韓報)』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1년에는 『한국문원(韓國文怨)』을 발간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힘썼다. 1933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특파원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풍옥상부대(馮玉祥部隊) 총사령관 양호성(楊虎城)과 한중 군사 협력 문제를 협의하였고, 1935년에는 조소앙·홍진(洪震) 등과 함께 월간 잡지 『진광(震光)』을 발행하여 항일 의식을 높였다. 1938년 한국독립당 중앙상임위원과 비서부장·조직부장·선전부장 등을 지냈으며, 같은 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 경기도 의원에 선출되어 광복 때까지 의정 활동에 참여하며 항일 활동에 전념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총사령부 부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총사령부가 충칭[重慶]에서 시안으로 옮겨지자 부관처장 대리로 복무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선전위원회 위원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간부 양성 군사 교육 기관인 중국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第四團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에서 안일청(安一淸)·한유한(韓悠韓)·송호성(宋虎聲) 등과 함께 군사 교관으로서 전술·역사·정신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법무처장과 정훈처장을 역임하였으며, 1943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군법실장과 광복군 정령을 지냈다.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1946년 귀국하였으며, 국민의회 대의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50년에는 경기도 양주에서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광복전우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2년 7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7.27 오타 수정 활동사항 중 한국문원 한자 오기 수정 怨->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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