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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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聖模 |
이칭/별칭 | 자중(子中),월당(月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만용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던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종교인.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중(子中), 호는 월당(月塘). 아버지는 행연서도찰방(行延曙都察謗) 최영오(崔永五)이며, 친아버지는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 최영칠(崔永七)이다. 부인 김씨는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이름을 ‘주신을 믿는다’는 의미의 김주신(金主信)으로 바꿨다고 한다.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
[활동 사항]
최성모(崔聖模)[1874~1937]는 서울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8년(고종 25) 15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뒤, 우연히 상동교회 앞을 지나가던 중 전덕기 목사의 시국 강연을 듣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1908년 세례를 받고 감리교회에 입교하였다.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YMCA의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그 후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1912년부터 서강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1917년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海州)의 남본정교회(南本町敎會)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당시 최성모는 전도와 신앙심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는 데 노력하였다.
1919년 2월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 듣고 적극 협조하기로 하였다. 2월 26일 이승훈(李昇薰)·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함태영(咸台永)·안세환(安世桓)·이갑성(李甲成)·박희도 등 기독교 측 대표들과 한강 인도교 옆 흑석동 입구 음식점에서 만나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 선언서와 기타 문서에 서명 날인할 기독교 측 대표를 뽑았다. 다음날인 2월 27일에 이필주의 집에서 기독교 측 대표들과 다시 만나 독립 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한 후, 기독교 측의 민족 대표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 밤에는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 측 민족 대표들과 만나 독립 운동 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최성모는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 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쳤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이 박희도로부터 독립 선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느냐고 묻자 최성모는 “나는 권유를 받고 참여한 것이 아니라, 박희도로부터 독립운동의 말을 듣고 기뻐서 자진하여 참가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민중 교화 사업과 목회 활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서강교회를 거쳐 1922년부터는 상동교회에서 2년간 시무하였고, 만주 목단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는 한편, 다롄감리교회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이후 충청남도 천안교회와 예산감리교회에서 활동하다가 병으로 은퇴하였다. 1933년 이후 수원에서 요양하다가 1937년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예비군 훈련장 안에 있다가, 2006년 9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묘비 번호 290번]으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