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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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佳納里 山神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1리 가래비마을 |
집필자 | 서영각 |
[정의]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1리 가래비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가납리 산신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 밤 자정 이후 가납1리 가래비마을 뒷산에서 도락산 산신에게 마을의 무사와 풍요로움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가래비마을은 광적면에서 가장 큰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원 및 변천]
가래비마을 산신제를 언제부터 지냈는지 알 수 없으나, 6·25 전쟁 당시 3년 정도만 중단한 이후 제사를 거르지 않고 줄곧 지내 왔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가납리 마을 사람들이 지내는 마을 제의는 어디까지나 명칭과 의식 모두 산신제이다. 하지만 어느 산의 산신을 숭배하는지 그 대상은 드러나 있지 않다. 축문에도 이 마을에서 치성을 드리는 산신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제사를 지낼 때 도락산을 향해서 상을 차린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도락산 산신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근래 산신제를 지내는 곳은 원래 산제를 지내던 자리가 아니다. 마을이 개발되고 공장과 주택이 들어서면서 산신제를 지내던 제사 터가 사라져 버린 뒤로 장소를 옮겨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 천막을 치고 그 안에 제사상을 마련한 다음 병풍을 치고 제물을 올린다.
[신당/신체의 형태]
신당이나 신체를 나타내어 모시는 구체적인 대상은 없다. 다만 산제사를 지내던 터가 있어 그곳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제사 터는 평평하게 흙으로 단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 산제사를 지내던 곳은 2000년대에 지내던 자리보다 더 아래쪽[남쪽]에 있었지만, 그곳에 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서 지내고 있다. 가래비마을에는 산신제에서 사용하던 제기가 보관되어 있어 제사를 지낼 때 꺼내다 쓴다.
[절차]
산제사를 지내기 열흘 전쯤에 마을에서 덕망이 있고 정갈한 사람을 5명 선출하여, 이들로 하여금 산신제를 지내도록 한다. 산신제를 지내기 일주일 전에 제관과 축관 및 선화주와 앉은 화주를 정한다. 선화주는 서서 일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며, 앉은 화주는 앉아서 일하는 이들을 이른다. 다시 말해 선화주는 잡일을 하는 이들을 이른다.
산신제에 필요한 일을 하는 데에는 여자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제물을 장만하는 화주인 ‘앉은 화주’ 1명과 제물의 준비와 각종 잔심부름을 하는 선화주 2명, 제를 주관하는 제관 1명, 그리고 축관 1명을 선출하여 이들이 제를 진행한다. 제관을 선출하면 옛날에는 제관 집 대문 앞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쳤다. 제를 지내기 일주일 전쯤에는 앉은 화주와 선화주가 모여 항아리에 조라술을 담근다. 이것을 산제사 터에 묻고 내려온다.
화주들은 제물을 구입하고 제주를 담그는 일을 맡는다. 산신제 전날 제물을 장만한다. 제물은 가래비장에 나가 준비하는데, 제물 중에 가장 큰 것은 소머리이다. 소머리 한 개와 소의 앞다리, 뒷다리를 각기 한 개씩 구입한다. 그 외에 사과, 배, 밤, 대추, 메 한 그릇, 백설기 한 시루, 육탕 등을 장만한다. 이 외에 양초 2개와 향도 빠트리지 않는다. 오랜 옛날 제대로 산신제를 지내던 시절에는 소머리 대신에 돼지를 잡아 통으로 썼다고 한다. 후에 비용이 많이 들자 돼지 대신 소머리로 대치하였다고 한다.
선화주들은 9월 그믐날 오전에 산으로 올라가 산제사 터와 그 주변을 청소한 다음 임시 천막을 치고 제사를 지낼 준비를 한다. 나머지 제관 일행은 그날 저녁을 먹은 다음 자정 무렵이 되면 산에 올라 제물을 진설하고 먼저 강신을 한다. 산신을 부르는 과정인 강신은 단잔으로 끝낸다. 다시 제물을 올린 다음 잔을 올리고, 제관이 재배를 하고 축문을 읽는다. 축관이 축문을 읽는 독축 과정이 끝나면 제상의 메 뚜껑을 열어 놓는다.
다시 잔을 올린 다음에는 마을 세대주 별로 소지를 한다. 한 사람이 호명을 하면서 축원을 하면 다른 사람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한지에 마을 주민의 명단을 한자로 적어 계속 이어 붙였기 때문에 매우 길다. 2002년 산신제를 지내던 해의 사례를 보면, 마을 주민 명단이 2백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소지를 올리는 일은 두 사람이 맡는다. 한 사람은 소지에 적혀 있는 이름을 부르고,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소지를 태워 버린다.
소지를 올리는 방식은 아무런 축원 내용 없이 기원 대상자를 부르는 방식인데, 마을 주민의 이름을 다 불러 소지를 끝내면 음복을 하는 것으로 제의는 일단 마무리된다. 그 다음에는 철상을 하고, 제관 혼자 음복을 하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난다. 제사가 끝날 무렵이 되면 마을에서는 부정 타지 않은 사람을 골라 산으로 올려 보낸다. 이들은 제관과 함께 소머리와 제물을 나누어지고 산을 내려온다.
[축문]
2002년 산신제에 쓰인 추교동 산신 축문(楸橋洞山神祝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세차 임오 십월정축삭 초일일 정축 추교동대표○○○ 감소고우산신존령전기서류역 시유중추 유세일신 자솔동민 거사감형 겸원복래 근이주과 서수일천 복걸보우 우신 상향(維歲次 壬午 十月丁丑朔 初一日 丁丑 楸橋洞代表○○○ 敢昭告于山神尊靈前氣序流易 時維中秋 維歲一新 玆率洞民 去事監亨 兼願福來 謹以酒果 庶羞一薦 伏乞保佑 佑神 尙饗).”
[부대 행사]
별도의 부대 행사는 없다. 산제사가 끝나고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나눠 먹으면서 결산을 보는 것을 부대 행사로 볼 수 있다.
[현황]
가납리 마을은 붕어혈의 형국을 하고 있어서 마을에서 절대로 오리를 기르지 못하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오리를 키우면 젊은이들을 다 죽이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는 산신제에 대한 믿음이 커서 2년 정도 산신제를 지내지 않았더니 마을의 청년들이 많이 죽는 일이 생겨 다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2년에도 산신제를 꽤 크게 지냈을 정도로 가납1리 가래비마을에서는 2011년 현재까지 거르지 않고 산신제를 지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