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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리 장천동 안골 산제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482
한자 釜谷里 長川洞 - 山祭祀
이칭/별칭 부곡리 산신제,도당 치성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안골
집필자 서영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안골 지도보기
성격 민간 신앙|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3월 1~5일|음력 9월 1~5일

[정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장천동 안골에서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부곡리 장천동 안골 산제사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에 장내말 뒷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인륜봉 산신에게 마을 공동으로 지내던 제사이다. 이 제의의 명칭을 ‘부곡리 산신제’ 또는 ‘도당 치성’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부곡리 마을 전체가 함께 지내던 산신제였으나 언제부턴가 윗가마골안골이 따로 지내게 되었다. 부곡리 장천동 안골 산제사는 음력 3월과 9월의 초하룻날에 제사 날짜를 정하는데, 제사는 반드시 1일에서 5일 사이에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만약 동네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열흘 뒤에 다시 날을 잡았다. 한 예로 마을에 상을 당한 집이 있으면 산신제 날짜를 그만큼 연기하는 것이다.

[연원 및 변천]

부곡리는 가마골이라 하여 장천(長川)[장내말], 장골, 은행동 등을 중심으로 한 윗가마골[쌍부곡, 부곡1리]과 역전말[동네말], 무두리[수회동] 등의 하부곡[부곡2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어서 가마골이란 지명이 생겼다. 부곡리 산신제는 원래 부곡1리와 부곡2리 마을 전체가 함께 지냈는데, 이를 ‘도당 치성’이라고도 불렀다. 도당 치성이란 마을 전체가 신당에서 치성을 드리는 동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1980~1990년대부터 두 마을 모두 산제당은 한 군데를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부곡1리의 윗가마골과 부곡2리가 제사를 따로 지내왔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은 당집의 형태로 마을 뒷산인 인륜봉 자락에 있었다. 장골마을 뒷산에 기와지붕을 갖추고 그럴듯하게 지어진 당집이 있었으나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아랫마을인 장내말 뒷산으로 옮겼다. 시멘트 기단 위에 콘크리트 벽을 세우고 슬레이트 맞배지붕을 얹은 건물로서 정면에는 두 개의 문이 있고 ‘산신당’이라고 쓴 작은 현판을 내걸은 건물이었다. 산제당 안에는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 산신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림을 걸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대동네 도당이라고 불렀다. 부곡1리와 부곡2리가 산신제를 따로 지내면서도 산제당은 함께 사용하였으므로 산제 날짜가 같은 날로 잡히면 우선순위를 정해 제를 지냈다.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함께 지내는 대동 산신제 외에도 개인들이 찾아와 산제당 주변에서 노구메[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를 지어 치성을 드리는 일이 많았다. 그 바람에 산제당 주변에는 늘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었고, 산제당의 관리는 마을에서 정한 사람이 맡았다.

[절차]

큰 틀에서 보면 부곡리 장천동 안골 산제사는 일반 제사와 다를 것이 없다. 제의 날짜와 화주가 정해지면 그날 당장 화주는 산신당에 올라가 조라술을 담가 둔다. 화주와 반장은 제의 당일 제물을 구입하여 제사 지내는 날 저녁 무렵까지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화주 집에서 제사 음식을 마련하며, 저녁이 되면 산신제에 참가할 사람은 산제당으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마을의 남자 어른과 깨끗한 부인네들이 참석하여 자정 무렵에 산신제를 지내는데, 제의 시간이 다가오면 이장과 마을 남자 어른 몇 사람이 화주 집으로 가서 제수를 지게에 지고 산신당으로 간다. 화주 집 부인도 함께 올라가 노구메를 짓고 제물 상차림을 거든다. 상차림에 쓸 제기는 산신당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으며, 이것은 산신제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제물은 앞에서부터 모두 5열로 진설한다. 맨 앞줄[산신할아버지 할머니 그림 족자가 있는 곳에서부터 가장 먼 쪽] 좌측에서 우측으로 가면서 밤, 배, 조과, 사과, 감, 대추와 같은 삼색실과를 놓는다. 둘째 줄에는 나박김치와 숙주나물을 둔다. 셋째 줄에는 포와 육적, 누르미, 어적을 둔다. 넷째 줄에는 육탕과 소탕, 어탕을 두며, 마지막으로 다섯째 줄에는 전과 두 개의 잔, 그리고 시저를 올려놓는다. 이것은 각 가정의 기제사 제물 진설법과 기본적으로 같다.

헌관은 화주가 맡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인네 혼자인 집에서 화주를 맡을 경우에는 동네 어른이 대신하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산신제 제물 외에 ‘소산’이라 해서 산신 옆에서 시중을 드는 잡신들에 대한 몫도 따로 마련해 준다는 점이다. 이 상은 산신 제상 오른편에 조금 낮고 작은 제단에 따로 마련해 주는데, 제물은 고기를 제외한 다른 음식을 조금씩 담아서 올린다. 이외에 마을 부인네들 중에는 산신당에서 노구메를 따로 지어 올리고 개인 치성을 드리는 이도 있어 각자 쌀을 준비해 가기도 했다.

제의 절차도 크게 보아 일반 제사와 유사한데 참신, 헌작, 독축, 소지, 폐문, 철상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소산’에는 헌관이 절을 한 번 하는 것을 끝으로 특별한 의식은 없다. 화주와 제관은 헌작과 독축 과정을 끝내면 동네 소지와 자기 소지를 올리며, 제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소지를 직접 올린다.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동네 소지로 대신한다. 마지막으로 폐문과 철상의 과정을 끝내고 나서 산신당 뒤에 술 한 잔을 따라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산신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산을 내려온다.

[축문]

부곡리 장천동 안골 산제사와 부곡리 장천동 윗가마골 산제사의 축문은 같다. 부곡리 산신제의 대상은 인륜봉 산신이다. 마을을 잘 지켜 주고, 액운을 막아 주며, 상서로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마을 공동체가 산신에게 축원하는 내용이 축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추위와 더위, 물과 바람 등이 순조롭고 산에 오르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하지 않게 해 주고, 집안이 평안하여 자다가 놀라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바람도 있다. 가축이 잘 자라고, 힘써 밭을 갈면 풍요를 가져다 달라는 염원도 표현하였다. 축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유세차기사삼월병술초삼일무자화주아무개 동민일동감소고우일륜봉산령지신 숭고유악 천감토비 귀신수호 유혁궐령 수형산청 호표도장 우아일동 범유소도 사아동민 항지백상 첩어영향 춘추치향 생비주향 가가송도 야다방목 특박성독 인인제목 기유번식 세열민자 산행불포 풍한서습 신강가평 야귀무경 구려산좌 수고차강 판시륜재 이지계견 수급우마 경전복력 줄장이상 서사무흠 소재항서 복유존령 실뢰생양 온도일세 흠차경제 상향(維歲次己巳三月丙戌初三日戊子化主아무개 洞民一同甘昭告于日輪峰山靈之神 崇高維嶽 泉甘土肥 鬼神守護 有赫厥靈 水瀅山靑 虎豹道藏 佑我一同 凡有所禱 肆我洞民 降之百祥 捷於影饗 春秋値饗 牲肥酒香 家家頌禱 野多放牧 特薄誠篤 人人齊沐 旣有番殖 歲熱民滋 山行不佈 風寒署濕 身康家平 夜歸無驚 驅厲山左 壽考且康 販柴輪財 以至雞犬 遂及牛馬 耕田服力 茁長而狀 庶事無欠 消灾降瑞 伏維尊靈 實賴生養 穩度一歲 欽此敬祭 尙饗).”

[부대 행사]

산제를 끝내고 화주 집으로 가서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제물을 나눈다. 제사 경비를 낸 집들마다 음식을 똑같이 나누어 주는데, 예전에는 긴 삼베를 깔고 제물을 균등하게 나누어 싼 다음 짚둥우리를 만들어서 거기에 담아 주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제물이 15지게가 넘을 정도로 많았다고 하는데, 근래에는 제물도 간단하고 양도 적으며 비닐봉지에 간단히 담아서 나눠 먹고 있다. 경비를 결산하고 동네 사람들이 음복을 하는 것이 이 산신제의 유일한 부대 행사라고 할 수 있으며, 제의 뒤에 치러지는 별도의 뒤풀이 행사는 없다.

[현황]

과거에는 부곡리 마을 전체가 함께 모여 봄가을로 두 차례 산신제를 지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부곡1리와 부곡2리가 따로 지냈으며, 산신제에 참여하는 사람도 70~80% 이하로 줄어들어 산신제에 대한 믿음도 크게 바뀌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산신제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2011년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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