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800 |
---|---|
한자 | 蘆原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기도 양주에 설치되었던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고려와 조선 시대 주요 도로에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되어 교통 통신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불렀다. 노원역은 청파역과 함께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함경도 지방을 연결하는 첫 번째 역으로 청파역과 함께 병조에서 관리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노원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공무를 수행 중인 관원 등의 이동, 각종 문서의 수신과 발신, 지방에서 올리는 진상품(進上品)과 공물(貢物)의 수송 등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특히 함경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으로서 서울에서 출발하는 첫 번째 역이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 병지 참역조(站驛條)에는 청교도에 모두 15개 역이 있는데 이 가운데 남경에 노원역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 시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양주도호부에 역이 6개 있는데 이 가운데 노원역이 포함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한경지략』에는 노원역이 흥인문 밖 4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860년대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에는 흥인문 밖 1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 후기 고지도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도 노원역이 중랑천 서쪽 수유현 아래쪽에 표기되어 있어 흥인문으로부터 1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밖에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노원역 들판에서 유숙하였고, 성종 때는 노원역과 보제원을 연결하는 제방과 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아버지 선릉에 행차할 때 노원역 서쪽 길을 닦아 이용하기도 했다.
[내용]
고려 시대 노원역은 수도인 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있었던 역이다. 조선 시대는 수도 한성에서 북쪽으로 누원과 녹양역을 거쳐 원산이나 함흥, 경흥 등 함경도 방면으로 연결하는 교통로에 있었던 역이다. 청파역과 함께 도성 밖 성저십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조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조선 초기 양주에 소속되었으나 15세기 이후 성저십리 지역은 한성부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노원역에는 국가에서 마위전(馬位田)을 지급하여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변천]
조선 초기의 지리지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노원역의 위치는 동대문에서 4리 지점인 제기동과 안암동 일대로 추정되며, 1860년대 김정호의 『대동지지』나 「대동여지도」의 고지도에 표기된 바에 의하면 수유현 아래쪽으로 흥인문에서 10리 지점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노원역이 이동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며, 고지도에 표기된 바에 따르면 중랑천 서쪽 지역인 현재의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일대로 추정된다.
개항기에는 노원역에 지급되었던 위전을 홍릉으로 이속시켰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노원역은 청파역과 함께 한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병조에서 직접 관할 할 정도로 중요시하였으며, 서울에서 함경도로 왕래하는 인마와 공문서들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었고, 왕들도 간혹 노원역에 들려 쉬어 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