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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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夢星神道碑 |
이칭/별칭 | 영암 장천리 전몽성 신도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문혜지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61년 - 전몽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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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97년 - 전몽성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924년 - 전몽성 신도비 건립 |
현 소재지 | 전몽성 신도비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전몽성 |
크기(높이,너비,두께) | 210㎝[비신 높이]|63㎝[비신 너비]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전몽성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전몽성(全夢星)[1561~1597]의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 등을 역임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1533~1592]과 함께 금산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함평 현감 및 이성(尼城)[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 현감을 역임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아우 전몽진(全夢辰), 첨사 김덕흡(金德洽)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수차례에 걸쳐 왜적을 격퇴하던 중 1597년 영암군 해암포에서 전사하였다. 숙종 때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영암의 장동 서원(長洞書院)에 제향되었다.
[건립 경위]
전몽성 신도비(全夢星 神道碑)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격퇴한 전몽성을 기리기 위해 1924년에 호남 유림들의 건의로 세워졌고, 비문은 송환기(宋煥箕)가 지었다.
[위치]
전몽성 신도비는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의 장천 초등학교 근처 전씨 충효문(全氏 忠孝門) 뜰에 서 있다.
[형태]
비석의 규모는 높이 210㎝, 너비 63㎝이다.
[금석문]
비석에는 ‘증 병조 참판비(贈兵曹參判碑)’라고 쓰여 있다.
[현황]
전몽성 신도비는 비석의 마모가 심하지 않고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으며, ‘영암 장천리 전몽성 신도비’로도 불린다.
[의의와 평가]
전몽성은 조선 중기 영암 출신의 무신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국난이 닥쳤을 때 스스로 나서서 아우와 동료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왜적을 격퇴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전몽성 신도비는 이런 전몽성을 기리기 위해 호남의 유림들이 나라에 건의하여 세운 비석이자, 전몽성의 행적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