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66 |
---|---|
한자 | 梁達泗功績碑 |
이칭/별칭 | 창의장 양 공 달사 공적비,양달사 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혜지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18년 - 양달사 출생 |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55년 - 양달사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971년 - 양달사 공적비 건립 |
현 소재지 | 양달사 비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
성격 | 공적비 |
관련 인물 | 양달사 |
크기(높이,너비,두께) | 142㎝[비신 높이]|55㎝[비신 너비]|25㎝[비신 두께]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에 있는, 을묘왜란 때 의병장 양달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양달사(梁達泗)[1518~1555]의 자는 도원(道源)이고 호는 남암(南岩)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감역(監役) 양흥효(梁興孝)의 증손이며, 주부(主簿) 양승조(梁承祖)의 아들이다. 삼종숙(三從叔)인 양팽손(梁彭孫)의 문인이다.
제주 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1519년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난 양달사는 1537년(중종 32)에 무과에 급제하고, 1546년(명종 1)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전라 좌우 우후(全羅左右虞侯)와 진해 현감(鎭海縣監)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53년(명종 8)에 남해 현감(南海縣監)에 부임하여 있던 중 모친상을 당해 시묘 중이었는데,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란(乙卯倭亂)이 일어났다. 이에 양달사는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여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모았다. 그리고는 잘생긴 젊은이들을 모아 화려한 옷을 입혀 연희(演戱)를 벌이고, 왜군들이 참관하는 사이에 의병들과 관군들이 함께 공격하여 크게 왜군을 물리쳤다. 분격하는 왜군을 물이 없는 진흙땅으로 유도하여 다시 한 번 크게 승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양달사는 상을 당한 사람으로서 전쟁에 나간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는 당시 관군을 이끌었던 이윤경(李潤慶)[1498~1562]에게 공을 돌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양달사는 시묘살이를 계속했고 3년간의 시묘를 마쳤으나 전쟁 때 부상당한 여독을 뿌리 뽑지 못해 41세 되던 1559년에 결국 창독(瘡毒)으로 사망하였다. 양달사가 사망한 뒤에야 이 사실이 알려져 그가 사망한 뒤 100년 만인 현종 때 좌승지로 추증되고 충신으로 정려되었다. ‘창의장 양 공 달사 공적비(倡義將梁公達泗功績碑)’ 또는 ‘양달사 비’라고도 한다.
[건립 경위]
양달사 공적비는 양달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1년에 세운 비석이다.
[위치]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의 영암군청 근처 새마을 금고 위쪽에 위치한 장독걸샘 터 옆에 나란히 서 있다.
[형태]
비석의 규모는 높이 142㎝, 너비 55㎝, 두께 25㎝이다.
[금석문]
비석에는 ‘창의장 양 공 달사 공적비(倡義將梁公達泗功績碑)’라고 쓰여 있다.
[현황]
비석의 마모가 심하지 않고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영암 출신의 무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양달사는 을묘왜란이라는 국가의 큰 위기가 닥쳤을 때 본인뿐만 아니라 형과 동생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격퇴하였다. 게다가 전쟁의 공마저 관군에게 돌리고 양달사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시묘를 끝마치고 결국에는 전쟁의 상처로 사망하였다. 양달사 공적비는 이런 양달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자, 양달사의 의로운 행적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