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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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愼海翊 |
이칭/별칭 | 중거(仲擧)|병은(病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아람 |
[정의]
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
[개설]
신해익(愼海翊)[1592~1615]은 22세 때 알성 문과(謁聖文科) 장원 급제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며, 천성이 고결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오숙(吳䎘)[1592~1634]은 신해익의 문장을 두고 당세에 제일이라는 칭찬을 하였다.
[가계]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중거(仲擧), 호는 병은(病隱)이다. 참의 신희남(愼喜男)[1517~1591]의 증손자로, 할아버지는 신여경(愼餘慶)[1538~1592], 아버지는 신인(愼諲)이다. 어머니는 이용(李溶)의 딸이다. 부인 흥양 유씨(興陽柳氏)와의 사이에 아들 신성기(愼聖虁)를 두었다. 신천익(愼天翊)[1592~1661]이 형이다.
[활동 사항]
신해익은 1613년(광해군 5) 22세의 나이로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왕이 탄 수레 앞에서 시를 읊었는데, 신해익의 단정한 풍채와 낭랑한 음성을 듣고는 모두들 신선과 같다고 감탄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나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몇 년 뒤 예조 좌랑에 임명되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으나, 앓던 병이 악화되어 스물다섯의 나이에 요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