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33 |
---|---|
한자 | 愼天翊 |
이칭/별칭 | 백거(伯擧,소은(素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아람 |
출생 시기/일시 | 1592년 - 신천익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신천익 문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5년 - 신천익 이조 참의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54년 - 신천익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신천익 이조 참판·한성부 우윤에 임명됨 |
몰년 시기/일시 | 1661년 - 신천익 사망 |
사당|배향지 | 송양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30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거창 |
대표 관직 | 이조 참판 |
[정의]
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거(伯擧), 호는 소은(素隱)이다. 참의 신희남(愼喜男)[1517~1591]의 증손자로, 할아버지는 신여경(愼餘慶)[1538~1592], 아버지는 신인(愼諲)이다. 어머니는 이용(李溶)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천익(愼天翊)[1592~1661]은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한 뒤 1615년(광해군 7)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하여 사직한 뒤 낙향하여 영암 이우당(二友堂)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홍문관·사간원의 요직에 제수되었지만 관직에 뜻이 없어 나아가질 않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제학·대사간·이조 참의를 지냈다. 1659년(효종 10) 신천익은 당시 이조 판서이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추천으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학문과 저술]
신천익은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 뒤로는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며 문장과 시부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송시열이 신천익의 문장을 크게 칭찬한 바 있으며, 아우 신해익(愼海翊)[1592~1616]과 더불어 문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신천익의 저서로는 『소은 유고(素隱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신천익은 영암 송양사(松陽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