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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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淵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7월 14일 - 박연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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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952년 4월 22일 - 박연 전투,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영천성 점령이 발단 |
발생|시작 장소 | 박연 전투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현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정세아|정대임|권응수 |
[정의]
1592년(선조 25) 7월 14일 영천 지역 의병 연합진이 신녕현 박연(朴淵)에서 왜군을 물리친 전투.
[개설]
박연 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22일 왜군에 의해 영천성이 함락된 후, 정세아(鄭世雅)·정대임(鄭大任)·권응수(權應銖) 등의 의병장이 연합하여 7월 14일 신녕현 박연에서 왜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의병과 관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고, 영천성 탈환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22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이 이끄는 군대는 영천성을 점령한 후 1,000여·명의 군사를 주둔시켜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토록 하였다. 성에 주둔한 왜군들이 인근 마을을 대상으로 약탈과 방화 및 살육을 일삼자 4월 27일 영천 지역 지식인들은 창의 거병하였다. 유학자 정세아·정대임과 무인 권응수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경과]
신녕현 박연은 안계·의흥·영천·하양 등지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이다. 왜군 1백여 명은 봉고어사(封庫御史)를 사칭하여 한복을 입고 군위에서부터 신녕 방면으로 노략질하면서 내려왔다. 이에 7월 14일 영천 의병장 정세아·정대임, 신녕의 권응수, 하양의 신하(申河), 의흥의 홍천뢰(洪天賚) 등이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그리고 복병장 박응기(朴應琪)·박인입(朴仁立) 등은 겁림원(迲林院) 근처에, 조덕기(曺德琪)·조성(曺城)·김호(金浩) 등은 안로에, 권응수 휘하 정응거(鄭應据)·허운련(許雲連) 등은 여음동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군이 오자 기습 공격을 했다.
돌연한 공격에 당황한 왜군들은 의흥과 하양 방면으로 도주했고, 의병들은 소계(召溪)까지 추격하여 적을 격살했다.
[결과]
의병들은 37명의 왜군을 참살했고, 장검과 장창 40여 자루 그리고 왜장의 기마 등을 노획했다.
[의의와 평가]
박연 전투는 영천성 탈환 이전에 영천 지역 의병들이 왜군에게 승리한 전투 중 하나다. 이 전투의 승리는 영천 의병진에 상당한 전략적 효과를 거두었기에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