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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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復城戰鬪 |
이칭/별칭 | 영천성 복성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단 시기/일시 | 1592년 4월 22일 - 임진왜란 때 영천성 일본군에게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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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592년 7월 23일 - 영천 관군과 의병들은 주남들에 의병본부를 설치함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7월 26일 - 임진왜란 때 영천복성 전투에서 영천성 탈환 시작 |
종결 시기/일시 | 1592년 7월 28일 - 임진왜란 때 영천복성 전투에서 영천성 탈환 완료 |
발생|시작 장소 | 영천복성 전투 발발지 - 경상북도 영천 지역 |
종결 장소 | 영천성 수복 장소 - 경상북도 영천시 주남들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권응수|정세아|정대임 |
[정의]
1592년(선조 25) 7월 26일부터 7월 28일까지 영천 지역 의병들이 영천성을 탈환하기 위해 왜군과 싸운 전투.
[개설]
영천복성 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22일 왜군에게 영천성이 점령당하자 영천 지역 의병이 중심이 되어 인근 의병들과 연합하여 성을 탈환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의병이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로 꼽히며, ‘영천복성 전투’ 또는 ‘영천성 복성 전투’라고 불린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발대가 부산포에 도착했고, 다음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가 부산성을 점령했다. 이어 제2번대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 제3번대인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대, 그리고 제4번대부터 제9번대가 조선에 상륙하여 육상으로는 3로(路)로 구분하여 공격하였다.
그 중 제2번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좌로를 선택하여 4월 19일에는 언양, 21일에는 경주를 점령했고, 22일에는 영천으로 진격했다. 왜군이 나타나자 영천성을 지키던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무혈입성(無血入城)한 왜군은 성에 1,000여 명의 군사만 남겨 둔 채 주력부대는 신녕현·비안면·용궁현을 거쳐 충주 방향으로 북진하였다.
한편 영천에 주둔한 왜군이 읍성을 거점으로 약탈과 방화 및 살육을 자행하자, 영천 지역 유학자들은 5월 초 창의거병(倡義擧兵)[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 의병을 일으킴]하였다. 영천에서는 유학자 정세아(鄭世雅)·정대임(鄭大任), 신녕에서는 무인 권응수(權應銖)가 중심이 되어 주위 여러 지역 의병장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왜군을 공격했다.
창암(蒼岩) 전투, 박연(朴淵) 전투, 겁림원(迲林院) 전투 등에서 의병들은 승리를 거두어 영천성 복성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창암 전투는 경주와 안강 방면으로부터 영천의 왜군을 고립시킨 전투였으며, 7월 14일의 박연 전투는 북으로 연결되는 보급로를 차단한 전투였다. 또한 겁림원 전투는 7월 24일 군위로 향하던 왜군을 군위 소계역(召溪驛)까지 추격하여 격퇴한 전투였다.
이 같은 전투에서의 승리는 영천에 주둔한 왜군들을 고립시켰고, 영천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계기가 되어 영천성 복성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경과]
영천 의병들은 1592년 7월 23일 읍성 남쪽 추평(楸坪)[현재 주남들]에 의병 본부를 설치하고 경주를 비롯하여 신녕·하양·자인·의성·의흥·흥해·의흥·영일·대구 등지에 있던 관군과 의병 3,560~3,970여 명을 집결토록 하였다.
이에 의병대장 권응수, 별장 김윤국, 좌총 신해, 우총 최문병, 중총 정대임, 전봉장 홍천뢰(洪天賚), 찬화종사(贊畵從事) 정세아·정담으로 전 병력을 좌·우·중 3대(隊)로 나누어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라 하였다.
의병 본부는 군기와 군율을 수립하고,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작전 계획을 논의하였다. 특히 영천 지역의 계절풍 ‘건들매’[음력 7, 8월에 건들건들 부는 바람. ‘산들바람’이라고도 한다]를 이용한 화공전(火攻戰)을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7월 26일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튿날 조직 편대에 따라 주력 부대는 동문과 남문을, 권응수와 박의 장군은 서문과 북문을 공략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서북풍을 이용한 화공을 펼쳐서 마침내 왜군을 섬멸시키고 영천성을 되찾고 조선인 포로 1,090여 명을 구했다.
[결과]
전투가 끝난 7월 28일 점검 결과, 아군은 사망 83명, 부상 238명으로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말 200필, 총과 창검 900여 자루를 노획했다.
영천군수 김윤국은 이와 같은 전과를 좌병사 박진에게 보고하였고, 박진은 다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렸다. 이에 복성전에 참여하여 공헌을 세운 의병장들은 동고록(同苦錄)을 맺었고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영천성을 수복함에 따라 경주·영천·안동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안동 이하 영남 좌도에 주둔하던 왜군들은 상주 지방으로 철수했으며, 영천의 왜군은 경주로 후퇴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천복성 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 아군이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로서 영남의 거성인 경주읍성 탈환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또한 영천성 전투의 승리는 영천 지역만이 아니라 경상좌도의 여러 읍을 보존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