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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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南義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 의병 부대.
[개설]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이 광무황제로부터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 부대이다. 초기에 정용기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1906년 9월 그의 석방을 계기로 의병진을 재편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신돌석(申乭石) 등 인근의 의병들과 연합작전을 벌이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의병진은 대장 정용기 이하 참모진이 전사하였다. 그 후에도 산남의진은 정환직과 최세윤(崔世允)을 중심으로 1908년까지 경상북도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반일 감정은 극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대표적인 의병 부대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원용팔·정운경·박장호 등의 부대, 경상도의 김도현·유시연·신돌석 등의 부대와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 의병, 전라도의 최익현·백낙구·고광순 등의 부대, 그리고 양서 지역의 우동선·전덕원의 부대가 있었다.
[경과]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은 아들 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1906년 3월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했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 선봉장 홍구섭, 후군장 서종락, 좌영장 이경구, 우영장 김태언, 연습장 이규필, 도포장 백남신 등이 포진되었다.
산남의진은 영해 지방의 신돌석 의병부대를 후원하고자 북으로 진군하던 중, 경주 우각(牛角)에서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간계로 정용기가 체포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중군장 이한구가 지휘하였으나 7월 하순 경 해산하고 말았다.
1906년 9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포항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초 영일군 죽장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의병진은 괴멸하고 말았다.
그 후 정환직이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었으나 일본군의 추격과 단약 및 식량의 부족으로 해산하였고, 대장 정환직은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되어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최세윤(崔世允)이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대장에 취임한 후 산남의진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1908년 7월까지 유격 활동을 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의의와 평가]
산남의진은 영남 지방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의병부대로 인근 지역의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고,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전개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