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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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鏞基 |
이칭/별칭 | 정진택(鄭鎭宅),정관녀(政寬女),관여(寬汝),단오(丹吾)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인호 |
출생 시기/일시 | 1862년 12월 13일 - 정용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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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정용기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여 대장에 취임함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7월 - 정용기 경주 우각리에서 체포됨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4월 - 정용기 산남의진을 재차 결성하여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활동함 |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9월 1일 - 정용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정용기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정용기 추모비 건립[1963년] |
추모 시기/일시 | 1985년 - 정용기 추모비 건립[1983년] |
출생지 | 정용기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
활동지 | 정용기 - 경상북도 일원[영천, 영일, 청송 등] |
묘소 | 정용기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
소재지 | 추모비 -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 영천문화원 내 |
소재지 | 추모비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충효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영일 |
대표 경력 | 산남의진 제1대 의병장 |
[정의]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정용기(鄭鏞基)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이며, 정진택(鄭鎭宅) 또는 정관녀(政寬女)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정환직(鄭煥直)과 어머니 여강 이씨(麗江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1862년 지금의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당시 검단리]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
[활동 사항]
정용기는 천성이 활달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정의감이 투철했다. 정용기는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투서하였다.
그 외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 행위를 탄핵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이란 글월 및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를 발표하고 격렬한 가두 연설을 전개해 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 계몽에 힘쓰던 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부친 정환직(鄭煥直)과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힘을 합쳐 통유문과 권고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제1대 대장에 추대되었다.
정용기는 경주 우각리를 경유할 때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1907년 4월 재차 거의하여 영덕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다.
1907년 8월 산남의진 본진 100여 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1일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역습을 받아 격렬히 싸우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묘소]
정용기의 묘소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63년 영천시 창구동 영천문화원 내에 지역민들에 의해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1985년 후손들이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충효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