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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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芝山故宅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117-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훈 |
건립 시기/일시 | 1605년 - 영천 지산고택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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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0년 3월 11일 - 영천 지산고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9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영천 지산고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영천 지산고택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117-9[신광리 699] |
성격 | 고택 |
양식 | 안채: 장혀수장|사랑채: 장혀수장 |
정면 칸수 | 안채: 5.5칸|사랑채: 3.5칸 |
측면 칸수 | 안채: 1칸|사랑채: 3.5칸 |
소유자 | 조영목 |
관리자 | 조영목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
문물|보호단위 등급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조선 전기 선조 때 문신인 조호익(曺好益)이 건립한 살림집.
[개설]
조호익[1545~1609]의 본관은 창녕,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76년 최황(崔滉)에 의해 평안도 강동현으로 전가사변(全家徙邊)을 당한 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을 모아 왜군을 죽이고, 또 평양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형조정랑·안주부사·정주목사 등을 지내다가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도잠서당을 짓고 후학에 전념했다.
저서로는 『지산집(芝山集)』·『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등이 있고, 대창면 대재리 유후재 뒤에 묘소가 있다. 후에 이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고 문간(文簡)의 시호가 고쳐 내려졌다. 도잠서당 경내에 조호익 신도비가 있다.
[위치]
영천 지산고택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117-9에 있다. 대창면소재지에서 북안면 북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면 우측으로 영지사 방면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 가면 폐교된 신광 초등학교를 지나자마자 지일동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동쪽 산 밑에 영천 지산고택이 보인다.
[변천]
영천 지산고택은 이조판서로 추증된 조호익이 만년에 건립한 살림집으로 1605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2010년 3월 1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영천 지산고택은 신광리 지일동마을의 야산 곡부에 남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一’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 그리고 ‘一’자형 고방채가 튼‘口’자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전면과 좌측면으로 토석담을 두르고 살림집 우측 뒤의 높은 곳에 사당을 두었다.
안채는 정면 5.5칸, 측면 1칸의 팔작집으로 낮은 외벌대 자연석기단에 덤벙주초를 앉히고 대청 전면의 가운데 기둥만 원주로 하고 나머지는 방주를 세워 상부 가구로 완성했다. 대청 배면과 방의 전면에는 쪽마루를 두고, 정지와 안방 사이에 쪽문을 두어 편의를 강구했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정지·방·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영남 지방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3.5칸, 측면 3.5칸의 팔작집으로 낮은 두세벌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퇴칸에만 원주를 세워 간결한 장혀수장의 삼량가로 완성했다. 특히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건너지르지 않고 기둥에만 짧게 표현한 독특한 양식이며, 대들보 위의 간결하고 멋이 있는 약식 파련대공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특징은 조호익의 도잠서당에도 거의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현황]
평평한 대지에 안채·사랑채·고방채·사당이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인 종택의 규모에 비해 아담하고 소박한 배치구성이다. 사랑채 대청에 ‘지산 고택’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 대들보와 우측 청방간 대들보에 시렁을 얹어 수장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의 살림집으로 다소 규모는 작지만 실용적이고 가식 없는 간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 상부와 대공의 모습은 도잠서당의 것과 유사해 두 건물간의 유기적 관계를 엿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