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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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海面三一獨立運動 |
이칭/별칭 | 영해 318 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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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성내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종결 장소 | 성내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김세영|권태원|김혁동|김중명|권헌문|정규하|남효직|남세혁|박의락|서삼진|권상호|김실광|황선의|기독교 북장로파 |
[정의]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29명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2시 30분경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상북도 영덕에서는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상경한 김세영(金世榮)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3월 12일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洛坪洞) 교회에서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하였다. 또한, 김혁동(金爀東)·김중명(金重明)을 영덕·지품으로 보내 개신교 북장로파 신자들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였다. 3월 14일 병곡면 송천동(松川洞)으로 간 권태원은 권헌문(權憲文)을 필두로 한 권씨 가문 인사, 정규하(丁奎河)와 개신교 신자, 남효직(南孝直)과 남씨 가문 인사 등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렸다. 3월 15일부터는 개신교 신자, 양반 가문과 유지, 주민들에게 참가를 권유해 나갔다.
[경과]
1919년 3월 18일 장날을 맞이한 영덕군 영해읍 성내동 시장에 군중이 운집하였다. 계획한 대로 정규하가 태극기를 개신교 신자들에게 배부하고 서삼진(徐三辰)은 ‘한국독립만세’라고 쓴 종이를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오후 1시경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가 큰 태극기를 흔들고 박의락(朴義洛)이 중간 크기의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도 작은 태극기를 들고 함께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시장에는 사전 계획과 권유 활동으로 참여한 인사, 시장을 보러 온 지역민 등 5개 면의 20여 개 마을 주민 약 2,000여 명이 있었다. 주도 인사들이 독립 연설을 하며 독립만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독립만세 분위기가 고조되자 영해 경찰관주재소 경찰들이 시장으로 나와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주도 인사들의 지휘하에 군중은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영해 읍내 각처로 분산되어 일제 기관들을 공격 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중은 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보통학교로 가서 학생들에게 만세를 외치라고 하였으나 불응하였다. 정규하, 박의락 등이 훈도 배병렬(裵秉烈)을 끌고 다시 주재소로 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들이 군중을 제지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고 하자, 군중은 주재소를 공격하고 경찰들을 구타하고 제복·제모·패검(佩劍) 등을 탈취하였다. 사무실에 진입한 군중은 기구·기물·장부·서류 등을 파손하였다. 또한, 독립만세를 부르라는 요구에 순순히 응한 후 경찰들은 주재소를 벗어나 도망쳤다. 오후 2시경 보통학교를 공격해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대부분 파괴하고 건축용 자재도 파손시키며 숙직실의 훈도들 물건들을 파손하였다. 소학교에서도 교사(校舍)와 기숙사의 지붕, 기둥, 일부 벽을 남기고 파괴하고 학적부, 기타 공문서를 파기하며 훈도의 의류, 기물 등을 파손하였다. 우편소에서는 건물의 유리창 등을 깨뜨렸다. 면사무소에서는 군중이 밀려오자 면직원들이 도주하였다. 면직원들이 도주하자 군중은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사무실 의자, 물품 등을 부쉈다.
시장으로 다시 집합한 군중은 만세를 외치고, 주재소 옆에서 주도 인사들이 독립 연설을 하며 찬미가(讚美歌)를 부른 후 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주재소로 진입해 돌과 몽둥이로 주재소와 사무실을 파괴하고 사택에 들어가 가구나 의류를 파손하였다. 그리고 시장으로 모여서 다시 독립만세를 외치고 서문 시장 일대에서 군중은 휴식하였다. 오후 3시 반경에 영해주재소 경찰들의 통보를 받은 영덕경찰서 서장, 경찰 3명, 순사보 1명 등 5명이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영덕 경찰서 경찰들은 무장을 하고 군중 해산시키기 위해 서문으로 왔다. 남효직·남세혁(南世爀)·권상호(權相鎬)·김실광(金實光)·황선의(黃善儀) 등이 막대기를 휘두르고 돌을 던졌고 군중이 경찰들을 에워싸며 압박하였다. 위협을 느낀 경찰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주재소로 달아났고 군중은 뒤따라가서 주재소를 공격하고 무기들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였다. 상황이 극도로 격화되자 영덕 경찰들은 영해 경찰의 도움을 받으며 2차례로 나누어 주재소를 나와 영덕으로 탈주하기 시작하였다. 김실광·황선의 등 40~50명의 군중은 경찰들을 추적해 축산으로 향하였다.
축산에서는 영해의 군중과 축산 지역민들이 협력해 상원동(上元洞) 등에서 서장과 경찰 2명을 포박하고 제복, 제모, 무기 등을 파손시켰다. 군중은 경찰들을 끌고 영해로 돌아와 여관에 구금하였다. 또한, 경찰에게 획득한 총 세 자루와 칼을 시장으로 가지고 와서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영해 경찰은 민가에 숨거나 남문에서 군중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3월 19일에도 미리 약속한 대로 아침부터 성내동 일대에 지역민들이 집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인근 마을 주민들이 합세하여 군중은 점차 증가해 600~700명에 이르렀다. 오전 11시경 경상북도 포항헌병분대장이 헌병 6명을 데리고 영해에 도착하였으나 군중의 위세에 눌려 진압 해산시키지 못했다. 다만 경찰 5명을 구출하고 탈취당한 소총 2정을 회수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오후 4시에서 5시경 대구의 제80연대 장교와 병졸 22명이 도착하자, 경찰과 헌병들이 합세해 군중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공포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강제하였으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들이 한국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 군경들이 실탄을 장전해 군중을 향해 발포함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여 군중은 영해 읍내를 떠나게 된다.
[결과]
영덕경찰서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경주지청을 거쳐 대구검사국에 송치된 78명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 상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공무집행방해 등의 죄목으로 재판받았다. 그 결과 1919년 6월 5일 징역 7년을 4명, 징역 4년을 5명, 징역 3년을 6명, 징역 2년을 18명, 징역 1년을 6월 3명, 징역 6월을 8명,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6명이 각각 선고 받았다. 7월 11일에는 징역 1년 6월을 2명, 징역 1년을 6명, 징역 6월을 1명,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18명이 각각 선고받았고, 1명에게는 무죄가 내려졌다. 이후 공소 제기하여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2명, 원판결 부분 취소에 징역 7년 1명, 징역 4년 3명, 징역 3년 3명, 징역 2년 12명, 징역 1년 6월 10명, 징역 1년 4명, 징역 6월 5명이 선고되었다. 상고를 제기한 3명은 고등법원에서 11월 6일 모두 상고 기각을 선고받았다.
궐석재판을 받은 남세혁은 대구지방법원에서 1921년 10월 14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대구복심법원에서 1922년 2월 3일 징역 3년 6월로 감형받았다. 이에 다시 상고를 제기하여 3월 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남효직은 1922년 8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영해면 3.1 독립운동은 영덕 지역에서 일어난 첫 번째 만세운동이다. 특히, 개신교 신자뿐만 아니라 유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기에 그 규모와 여파 또한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