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곡면 3.1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46
한자 柄谷面三一獨立運動
이칭/별칭 병곡면만세운동,병곡면독립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연표보기 - 병곡면 3.1독립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연표보기 - 병곡면 3.1독립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성내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병곡동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병곡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권영조|조영한|남교문|김몽룡|박수환|이상화|손무준|조태헌|권정필|김동택

[정의]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29명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2시 30분경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영덕에서도 서울을 다녀온 인사들에 의해 3.1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게 된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 등의 주도하에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면서 3.1운동이 시작되었다. 군내 5개 면의 20여 개 마을 주민 약 2,000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영해경찰관주재소,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공립소학교, 영해우편소, 영해면사무소 등을 공격하고 진압하려는 경찰들을 응징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일부 군중들이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주장하였다. 오후 2시경 정규하·박의락·서삼진(徐三辰) 등이 약 200명을 이끌고 병곡면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영해 독립만세에 참가하지 않았던 신평동(新坪洞)·송천동(松川洞)·원황동(遠黃洞)·아곡동(牙谷洞)·거무역동(居無役洞)·영동(榮洞) 일부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경과]

3월 18일 오후 4시경 400~500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정규하·김응조(金應祚) 등 4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군중들을 이끌고 병곡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영해경찰관주재소로부터 통보를 받은 경찰과 순사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주재소 앞으로 나와 군중들의 귀가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경찰의 제지에 맞서 돌, 몽둥이, 낫 등을 가지고 주재소로 진입하였다. 권영조(權永祚)·조영한(趙榮漢)·남교문(南敎文) 등이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김몽룡(金夢龍)·박수환(朴壽煥)·이상화(李祥和)·손무준(孫武俊) 등은 군중들과 함께 장부, 서류, 비품, 시설물 등을 파손하였다. 또한 경찰의 제복 등을 찢고 순사보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오후 5시경 경찰들은 군중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위협을 느껴 가족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도주하였다.

군중들은 재차 주재소를 공격 파괴하고 인접한 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면서기가 정규하·서삼진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조영한·남교문뿐만 아니라 조태헌(趙泰憲)·권정필(權正弼)·김동택(金東澤) 등도 면사무소로 진입해 창유리를 깨뜨리고 사무실 가구·기물 및 각종 문서와 서류 등을 주도적으로 파손하고 찢어버렸다. 군중들이 면사무소에 진입한 사이 평해헌병분견소에서 헌병 3명, 보병 2명이 출동해 주재소 경찰과 함께 군중들에게 사격 자세로 해산을 명령하였다. 정규하·서삼진·남교영(南敎英)이 앞으로 나가 “사격을 중지하라. 순사보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며 순사보를 인계할 것을 요구하였다. 경찰이 이를 거절하고 해산을 강요하며 계속 발포 위협을 하였다. 경찰의 위협에 정규하는 사상자 발생을 염려해 군중들에게 해산을 권유하였다.

[결과]

병곡면 3.1독립운동 관련자 28명은 이후 영덕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경주지청을 거쳐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4월 5일 19명, 4월 14일 4명, 4월 22일 2명, 5월 2일 5명, 미기재 3명으로 4차에 걸쳐 33명이 송치되었다. 이어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7개 죄명으로 1919년 6월 5일 징역6월에 집행유예3년 2명, 징역 6월 1명, 1년6월 2명, 2년 7명, 3년 4명, 4년 4명 7년 2명, 7월 11일 징역6월에 집행유예3년 4명, 징역 1년 2명이 선고받았다. 5명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가운데 19명이 공소를 제기하여 9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 취소에 5명이 감형되고 14명은 동일 형량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병곡에서 출발해 영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병곡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한 원정독립만세운동의 전형(全形)을 보인 독립운동이었다. 또한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 파괴하는 공세적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헌병과 경찰의 무력 위협을 받았으나 사상자 없이 자진 해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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