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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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盈德大所山烽燧臺 |
영어공식명칭 | Becon Tower on Mountain Daeso in Yeongdeok |
이칭/별칭 | 대소산 연대 봉화,대소산 봉수,봉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산2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창국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1년 9월 19일~2002년 1월 20일 - 영덕 대소산 봉수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지표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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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2년 8월 4일 - 영덕 대소산 봉수대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 지정 |
소재지 | 영덕 대소산 봉수대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산20 외 3필 |
성격 | 봉수 |
지정 면적 | 2,826㎡ |
관리자 | 영덕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대소산 정상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대.
[개설]
영덕 대소산 봉수대(盈德大所山烽燧臺)는 조선 시대 정치·군사적인 목적에서 봉(烽)[연기, 낮]과 수(燧)[횃불, 밤]로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설치된 통신 시설이다.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변천]
영덕 대소산 봉수대(盈德大所山烽燧臺)가 문헌상 처음 확인되는 것은 『경상도지리지』이다. '대소산 연대봉화(大所山煙臺烽火)'로 표기되어 있다. 영덕 지역은 동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관방 관련 시설이 이른 시기부터 설치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대소산 봉수는 조선 시대 편찬된 지리지·읍지류에 확인이 된다.
1916년 보고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를 보면 20세기 초반까지 대소산 봉수대는 원형 훼손 없이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한국통신의 중계탑 건설, 군부대의 초소 구축과 철책 설치, 통로를 위한 돌계단 설치 등의 개발로 인해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특히 봉수대 서쪽 능선 측면에 있었던 막사지(幕舍址)는 1981년 이후 한국통신이 통신탑과 이에 관련된 시설물을 건설하느라 완전히 제거해버렸고, 봉수대의 북동쪽과 남쪽 부분의 석축대(石築臺)는 사람들의 통행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이에 2001~2002년 지표조사를 시행하고, 후에 봉수대를 복원하였다.
[위치]
영덕 대소산 봉수대는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대소산 정상에 있다. 대소산은 축산면 축산리와 영해면 사진리·괴시리 뒤에 있다. 높이 270m에 자리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1년 8월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은 태영건설로부터 조사의뢰를 받아 2001년 9월 19일부터 2002년 1월 20일까지 봉수대의 외형 실측을 포함한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연조(烟竈)는 기저부 지름 10.5m, 높이 약 2.5m이며, 2m 위쪽에서는 9.8m였다. 따라서 위쪽이 약간 좁아지기는 하나 원추형이라기보다 원통형에 가깝고 높이는 2.7m를 약간 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 벽에는 다른 적석벽(積石壁)과 달리 붕괴된 석재 가운데 1.5m 이상 되는 장대석이 몇 개 끼여 있어 이곳에 아궁이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煙臺)와 방화장(放火墻)의 둘레는 약 45m와 약 300m이다. 연대는 서쪽 방향으로 전방후원형(前方後園形)의 석축 담장이며, 앞뒤 길이는 25m, 좌우 폭 20m이다. 석축 담장의 높이는 1916년 조사에서는 1.5m, 1981년 조사에서는 약 1m였으며, 폭은 약 1m이다. 방화장은 거의 제거되어 연대 주변에서만 무너진 상태로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있었다.
[현황]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개발 등으로 훼손된 봉수대를 복원하였지만 원형과 차이가 있다.
[의의와 평가]
영덕 대소산 봉수대는 영덕 지역의 여러 봉수대 가운데 가장 형태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영덕 지역의 조선 시대 통신시설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복원된 봉수대는 발굴조사 등을 거치지 않고 복원·정비하여 원형과 차이가 있어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