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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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盈德忠孝堂宗宅 |
이칭/별칭 | 영덕 충효당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6길 48[인량리 465]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재현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있는 고택.
[개설]
영덕 충효당 종택(盈德忠孝堂宗宅)은 재령이씨 영해파의 종택이다. 재령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파된 성씨로 고려 성종 연간의 이우칭(李禹稱)이 재령군(載寧郡)에 봉해지면서 재령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중시조는 이오(李午)이고, 이오의 증손자인 이애(李璦)[1480~1561]가 중부(仲父)인 이중현(李仲賢)이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부임할 때 따라와 지역의 대성인 진성백씨 백원정(白元貞)의 딸과 결혼하면서 인량리(仁良里)에 정착하였다.
[위치]
영덕 충효당 종택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인량리전통마을에 있다. 인량리전통마을은 영덕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마을로 마을의 북쪽은 칠보산에서 내려온 줄기가 있고, 마을 앞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를 송천(松川)이 흐른다. 종택은 인량리 서편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변천]
영덕 충효당 종택을 처음 창건한 사람은 재령이씨 영해파 입향조인 이애이다. 이애가 이중현을 따라 영해에 처음 온 것은 16세 때이고, 1561년(명종 16)에 82세로 인량리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따르면 처음 종택이 세워진 것은 16세기 초 중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이애의 손자인 이함(李涵)[1554~1632]이 기존의 위치에서 조금 뒤의 높은 자리로 옮겼다. 밀암 이재가 쓴 「충효당기(忠孝堂記)」에는 1602년(선조 35)부터 충효당의 경영을 시작하였고, 충효당의 이름을 지은 사람도 이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602년 이후부터 현재의 위치에 건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형태]
종택은 ‘ㅁ’ 자형 건물로 정면 7칸 반, 측면 6칸 규모이다. 가장 안쪽의 대청은 정면이 3칸이며, 사랑채는 대청의 왼편에 있다. 충효당은 별당(別堂)으로 종택의 서쪽 사랑채의 왼편에 있다. 자연석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동편 2칸은 방이며, 서편 6칸은 마루이다. 충효당의 편액은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다만 밀암 이재는 이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사당은 사랑채 축선 뒤편에 있다. 사당 건물 앞에는 가지가 두 갈래로 뻗은 회화나무가 있고, 주변에는 자미화[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사당에는 불천위(不遷位)인 이함의 신주(神主) 및 현 종손의 4대조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현황]
충효당은 재령이씨 영해파의 대종택으로 자리하고 있다. 매해 충효당에서 종손이 불천위로 제향된 이함의 불천위 제례를 주관한다. 충효당 건물은 조선 전기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판단되어 1984년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효당은 조선 전기 사대부(士大夫) 건축의 전형(典型)으로 건축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 불천위 종가의 건물로서 현재에도 계속 제례를 진행하고 후손들이 그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인문학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