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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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夏九 |
영어공식명칭 | Kim Hagu |
이칭/별칭 | 정보(鼎甫),추암(楸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직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676년 - 김하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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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02년 - 김하구 진사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719년 - 김하구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21년 - 김하구 성균관학유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23년 - 김하구 동학훈도·청암도찰방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29년 - 김하구 전적·감찰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30년 - 김하구 해남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32년 - 김하구 해남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733년 - 김하구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756년 - 김하구 부호군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59년 - 김하구 동지중추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762년 - 김하구 사망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직천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직천리 |
부임|활동지 |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 |
유배|이배지 |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 |
묘소|단소 | 구리골 -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봉전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수안 |
대표 관직 | 동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문신.
[개설]
김하구(金夏九)[1676~1762]는 1719년(숙종 45)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해남현감(海南縣監)·부호군(副護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가계]
김하구의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정보(鼎甫), 호는 추암(楸菴)이다. 김하구의 선대는 고려 전리판서(典利判書)를 지낸 김위(金渭)를 비조로 한다. 조선 초기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낸 김성정(金成鼎)이 영덕 입향조이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김난서(金鸞瑞)가 현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지낸 김흔(金昕), 증조할아버지는 김천승(金泉丞)을 지낸 김광국(金光國), 할아버지는 부호군 김도장(金道章), 아버지는 매창(梅牕) 김세희(金世煕)로 학문과 행의가 있었지만 일찍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부호군 장종한(張宗翰)의 딸 선사장씨(仙槎張氏)[울진장씨]이다. 부인은 권태중(權泰仲)의 딸 안동권씨로서 슬하에 김성협(金聲協)·김기협(金器協)·김오협(金五協) 형제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하구는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입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17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동학훈도·청암도찰방·전적·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730년(영조 6)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친 뒤 해남현감으로 부임하여 향약을 실시하였다. 1731년 5월 해남현감으로 재임 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도주한 죄수를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유로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6월 풀려났다. 이후 관직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하였다. 신유한(申維翰)·김덕오(金德五) 등과 교유하고, 이성룡(李聖龍)·권창조(權昌祚) 등의 문인을 양성하였다. 1756년 부호군에 제수되고, 1759년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고령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학문적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관료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시와 유배 중 가족, 친우들과 주고받은 시가 다수 전한다. 김하구의 유문은 영덕현령으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사손 이귀응(李龜應)[1729~1789]의 명령으로 영덕의 신진(新進)들이 1774년 향사당(鄕射堂)에 모여 5~6책으로 집성하였다. 그리고 신치달(申致達)과 김만보(金萬寶)가 종이를 구입해 선사(繕寫)하여 교감 작업까지 진행하려 했는데 차례로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김하구의 증손자들이 류범휴(柳範休)[1744~1823]와 이야순(李野淳)[1755~1831]에게 1818년과 1819년에 각각 행장과 묘지명을 받아 정리하였다. 신치달의 아들 신대중(申大重)이 김성련(金聖鍊)과 함께 앞 시기에 편차하여 둔 김하구의 문집 간행을 추진하였으며, 김하구의 아우 김정구(金鼎九)의 「정자공유고(正字公遺稿)」를 함께 붙여서 1823년(순조 23)에 『추암집(楸菴集)』으로 간행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봉전리 구리골[銅洞]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