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696
한자 南慶薰
영어공식명칭 Nam Gyeonghun
이칭/별칭 남경생(南慶生),응화(應和),난고(蘭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남경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남경훈 진사시 입격
몰년 시기/일시 1612년연표보기 - 남경훈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04년 - 남경훈 광산서원 제향
출생지 원고리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니전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광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이전재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길 471-24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영양
대표 관직|경력 진사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

[개설]

남경훈(南慶薰)[1572~1612]은 진사시에 입격했으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광산서원(光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가계]

남경훈의 본관은 영양(英陽), 초명은 남경생(南慶生), 자는 응화(應和), 호는 난고(蘭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남한립(南漢粒), 할아버지는 부장(部將)을 지낸 남광(南廣), 아버지는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낸 남의록(南義祿), 어머니는 직장(直長)을 지낸 박인수(朴仁壽)의 딸 춘천박씨(春川朴氏), 부인은 첨정(僉正)을 지낸 이준(李濬)의 딸 재령이씨(載寧李氏)이다.

[활동 사항]

남경훈은 1572년(선조 5)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원고리(元皐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한겨울에 병들어 누운 아버지를 위해 냇가에서 잉어를 잡아드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곽재우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06년(선조 39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같은 해 동리에 난고정(蘭皐亭)을 짓고 소요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아버지가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의 뜻을 거슬러 처벌받게 되었는데, 남경훈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호소하고 대신 벌을 받겠다고 청하였다. 이를 본 관찰사(觀察使)가 감동하여 방면해 주었으나, 옥살이 중 병을 얻어 1612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남경훈의 「난고선생유집(蘭皐先生遺集)」과 「난고선생유고(蘭皐先生遺稿)」가 『영산가학(英山家學)』에 수록되어 있는데, 유집은 『익양연방집(益陽聯芳集)』에도 실려 있다. 유집은 시(詩) 33수를 비롯해 부(賦)·표(表)·서(書)·전(箋)·서(序)·발(跋)·제문(祭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고는 남경훈의 행적을 엮은 것이다. 예학에 침잠하여 『사례해의(四禮解義)』 3권을 저술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이전(泥田)에 묘소가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조덕린(趙德鄰), 묘지명(墓誌銘)은 정옥(鄭玉)이 지었다.

[상훈과 추모]

1804년(순조 4) 남경훈·남길(南佶) 부자를 제향하는 광산서원[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이 건립되었다. 광산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고, 현재는 그 유지(遺址)에 표석을 세워 놓았다. 묘소 인근에 재실(齋室)인 이전재(泥田齋)[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길 471-2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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