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49 |
---|---|
한자 | 朴作之 |
영어공식명칭 | Park Jakji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준호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작지는 1860년(철종 11)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서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이다.
[활동 사항]
박작지는 1919년 3월 18일 영해면·병곡면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영해면·병곡면 만세운동은 기독교 측 김세영(金世榮)·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 등과 지역 유지들의 주도 아래 전개되었다. 특히 권태원이 3월 15일 병곡면 송천리의 정규하를 만나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정규하는 "3월 18일 영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정규하의 제안에 권태원이 동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권태원과 정규하는 영해면 3.1독립운동을 위해 동지규합 및 태극기 제작에 나섰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박작지는 정규하·남계병(南啓炳)·남효직(南孝直) 등 2천명의 군중들과 함께 영해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작지와 군중들은 영해면에 있는 일제 침략기관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뿐만 아니라, 공립보통학교와 공립소학교 등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박작지는 성내동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주재소·면사무소·공립보통학교 등지에서 건물 파손 및 공문서 등 기물을 파괴하였다. 나아가 박작지는 정규하와 함께 오후 2시경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인접한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일제주재소·면사무소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박작지는 영해면·병곡면 만세운동이 끝난 3월 19일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붙잡혔다. 당시 영해에서 250명, 병곡에서 40명이 붙잡혀 총 290명이 구금되었다. 박작지는 대구지방법원을 거쳐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