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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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姓氏-五百年: 寧海面元邱里 |
영어공식명칭 | The Village where Three Clans have lived side by side for 500 years: Wonguri, Yeonghae-myeo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현 소재지 | 원구마을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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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세 성씨가 500년 간 나란히 세거해 온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원구마을 이야기.
[개설]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는 영양남씨(英陽南氏)·무안박씨(務安朴氏)·대흥백씨(大興白氏)가 16세기 초엽과 중엽에 걸쳐 차례로 입촌하여 약 500년간 갈등 없이 나란히 세거하고 있다. 배타적으로 족결합을 하는 한국 종족집단의 특성에 비추어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배타적 종족집단의 공존 사례]
한국의 종족집단은 부계 조상의 혈통을 계승하였다고 인식하는 가계계승의식을 정신적 기초로 하여 조직된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비부계나 비혈연자를 경원시하는 혈연적 배타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또한 가계계승은 혈통의 계승뿐만 아니라 조상의 사회적 지위의 계승과 신분의 세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자신들의 신분적 지위가 우월하다는 점을 과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혈연적 배타성과 신분적 우월감은 배타적족결합의식(排他的族結合意識)으로 나타난다. 배타적 족결합의식은 안으로는 종족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정신적 기초가 되지만, 밖으로는 타 종족과 경쟁하고 타성을 배척하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여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종족집단 간의 대립과 갈등은 한 마을에 신분적 지위가 비슷한 여러 성씨가 장기간 공존하기 어렵게 만든다. 두 성씨나 세 성씨가 한 마을에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세력이 강한 어느 한 성씨가 마을을 석권하게 되고, 세력이 약한 성씨들은 점차 마을에서 밀려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족마을은 한 성씨가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두 성씨나 세 성씨가 한 마을에 장기간 세거하는 경우에는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거나 심각한 갈등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원구마을에는 지역사회에서 대표적인 양반 가문으로 인정받는 영양남씨·무안박씨·대흥백씨가 종족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수백 년간 나란히 공존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 세 성씨는 마을에 입주한 시기도 비슷하고, 조상의 위세나 경제적 지위도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며, 마을 내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수도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도 특별한 마찰이나 갈등 없이 오랜 세월 동안 한 마을에서 세거하고 있고, 마을의 중요한 공동체 의례로 행해지는 동제나 줄다리기에서 세 종족집단이 긴밀하게 협동하여 마을의 통합에 기여하고 있다. 배타적 족결합의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위세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 한국 종족집단의 일반적 특성에 비추어 보면 원구마을의 세 종족집단이 오랜 세월 공존하면서 마을의 통합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세 성씨의 원구리 정착과정과 주요 인물]
영양남씨·무안박씨·대흥백씨는 16세기 초엽과 중엽에 걸쳐 차례로 원구마을에 입촌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영양남씨로 원구리에 처음 입촌한 인물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을 거쳐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제수 받은 남비(南秠)[?~?]와 아들 남한립(南漢粒)이다. 이들이 원구리에 입주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남비가 150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남한립이 무안박씨 영해 입향조 박지몽의 딸과 혼인한 후에 울진에서 원구로 이거한 것으로 보아 1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원구리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비의 현손인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1572~1612]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남의록(南義祿)[1551~1620]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였고, 성균 진사가 되었으나 출사하지 아니하고 교학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감옥살이를 하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이러한 충절과 효행, 학덕을 높이 기려 유림의 총의로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게 하였다. 남의록은 임진왜란 창의의 공적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고, 160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하였다. 남경훈의 후손 중에 8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무안박씨는 영양남씨보다 조금 늦게 원구리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안박씨로 원구리에 처음 입촌한 인물은 영해 입향조 박지몽(朴之蒙)[1445~?]의 둘째아들 박양기(朴良基)와 셋째아들 박영기(朴榮基)인데, 박영기의 셋째아들 박세렴(朴世廉)[1535~1593]과 넷째아들 박세순(朴世淳)[1539~1612]이 원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530년대 초반에 정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원구리에는 박세순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박세순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첨지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서 경주판관이었던 조카 박의장(朴毅長)을 도와 800석의 군량미를 조달하여 승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사후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원구리 무안박씨 집안에서는 여러 명의 무관을 배출하였다.
대흥백씨의 원구마을 입촌조는 족한당(足閒堂) 백인국(白仁國)[1530~1613]인데 1556년에 원구리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인국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영해 지역에 성리학을 펼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6읍 교수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맞아 향인을 솔병하여 축산포의 왜적을 방어했고, 독자인 백민수(白民秀)[1558~1612]를 화왕산성 곽재우 진영으로 보내 참전케 하였다. 백민수는 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3등에 올라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백인국의 손자 백원발(白源發)[1597~1671]은 남경훈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남경훈의 사위가 되어 두 가문의 유대를 긴밀하게 다졌으며, 남경훈의 아들 5형제[남필흥(南必興)·남세흥(南世興)·남진흥(南震興)·남빈흥(南賓興)·남치흥(南致興)]가 모두 현달하여 지역사회에서 세칭 ‘오흥가(五興家)’라 부르게 되었다. 영양남씨 문중에서도 이들 5형제가 남씨 문중의 외손임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세 성씨는 경제적 기반도 매우 튼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세순은 임진왜란 때 800석의 군량미를 조달하고, 규모 있는 종택을 건립하여 대대로 유지할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튼실하였다. 백인국도 임진왜란 때 많은 군량미와 함께 아들 백민수를 곽재우 장군의 진영으로 보내 참전케 하였으며, 백인국의 후손 중에는 4~5대에 걸쳐 천석지기 재산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영양남씨는 무안박씨나 대흥백씨에 비해 재산 상태가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남의록이 경주성 탈환 작전에 많은 군량미와 함께 참전하여 복성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대로 300석지기 재산을 유지하면서 대묘(大廟)와 별묘(別廟)를 갖춘 종택을 보유해 왔다.
이처럼 세 성씨는 조상의 신분적 위세가 모두 출중하고 경제적 기반이 튼실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 내에 거주하는 성원의 수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1930년의 자료에 의하면 원구리에는 영양남씨 40호, 무안박씨 45호, 대흥백씨 31호, 기타 35호가 거주하고 있었고, 2014년에도 영양남씨 23가구, 무안박씨 22가구, 대흥백씨 22가구, 기타 30가구로 세 성씨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동제와 줄다리기에 나타난 종족 정체성과 마을 통합]
원구마을 세 성씨의 유대관계는 마을 공동제의인 동제의 운행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구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대보름날 첫새벽]에 동제를 지내는데, 세 명의 제관(祭官)은 세 성씨에서 한 사람씩 선출된다. 세 성씨 이외의 타성은 절대 제관이 될 수 없다. 정월 초하루나 초이튿날 각 종족집단에서 미리 제관을 선정해 두었다가 초사흗날 세 종족집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확정한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타 문중의 제관 선임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는다. 초헌, 아헌, 종헌의 순서도 제관의 연령순으로 하여 분쟁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한다. 동제는 전체 주민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체의 제의이지만, 원구마을에서는 세 성씨를 중심으로 제관을 선임해서 동제를 거행한다. 이런 점에서 세 성씨는 동제를 주관하는 제의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세 성씨가 긴밀하게 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또 원구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를 하였다. 광복 후 줄다리기는 중단되었지만 원구마을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날에는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몰려올 정도로 영해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민속놀이였다. 줄다리기는 두 편으로 나누어서 서로 힘을 겨루는 경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줄다리기는 마을을 지역에 따라 아랫마을과 윗마을, 동편과 서편,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등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진행한다. 그런데 원구마을에서는 세 성씨가 각각 한 팀을 이루어서 줄을 준비하고 경기에 임한다. 세 성씨 이외의 타성들은 각자 연고를 가진 종족집단의 성원이 되어 줄준비와 줄다리기에 참여한다.
보름날이 되면 각 성씨별로 준비한 줄을 들고 강변에 나와서 서로 줄을 걸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두 팀만 할 수 있는 줄다리기에 줄을 걸지 못하면 그 팀은 탈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두 팀이 줄걸기에 성공하면 한 팀은 윗마을, 다른 팀은 아랫마을이 되어 지역대결의 줄다리기가 진행된다. 탈락한 나머지 한 팀의 성원들은 거주지역에 따라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서 어느 한 편에 가담하여 줄을 당긴다. 이때부터는 종족집단의 성원이라는 혈연적 소속감을 버리고 마을 주민의 자격으로 줄다리기에 임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염원이 담긴 놀이이기 때문에 모두 열심히 참여한다. 근력만 있으면 노인들도 모두 줄다리기에 적극 참여한다. 일종의 의무감,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구마을의 줄다리기 의례는 혈연집단인 종족을 중심으로 줄을 준비하고, 줄걸기에서도 종족별로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일단 줄을 걸고 나면 혈연성을 넘어서서 지역에 바탕을 둔 마을 공동체의 축제가 된다. 혈연의식에 바탕을 둔 종족 간의 경쟁으로 출발해서[줄준비와 줄걸기],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지역대결[줄다리기]을 거쳐 주민 모두 하나가 되는 마을 공동체의 축제[뒤풀이]로 승화시키는 절묘한 메커니즘을 연출한다. 종족집단의 경쟁이 대립과 갈등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줄다리기를 통해서 전체 마을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세 성씨의 친화요인: 혼인연대]
영해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문으로 인정받는 세 성씨가 자신들의 신분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마을에서 500년 동안이나 공존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혼인을 통한 유대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종족집단이 부계혈통을 중시하여 사돈관계나 인척관계는 상대적으로 소원하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부계혈연에 버금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중요한 조상들[종손이나 현조 등]의 혼인은 그 자손들이 서로 내외손관계로 의식하여 특별한 유대감을 가지게 한다.
원구마을 세 성씨 간의 혼인연대는 영양남씨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영양남씨와 무안박씨, 영양남씨와 대흥백씨 사이에 혼인이 빈번하게 교환되고 있는 것이다.
무안박씨와 대흥백씨가 영양남씨와 빈번하게 혼인하게 된 데에는 입촌을 전후한 시기에 두 집안의 주요 인물들의 혼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양남씨로서 처음 원구마을에 입촌한 남한립이 무안박씨 입향조 박지몽의 딸과 혼인한 후 처가 인근의 원구리에 정착하고, 뒤이어 처남인 박양기와 박영기 형제가 원구마을로 옮겨 온다. 대흥백씨로서 원구마을에 처음 입촌한 백인국은 영양남씨 입촌조인 남한립의 증손자를 사위로 삼고, 손자 백원발은 남경훈의 사위가 된다. 백원발의 아들 2명, 손자 1명, 증손녀 1명도 영양남씨와 혼인하였다. 입촌 초기의 이러한 혼인 유대가 후대에까지 이어져서 영양남씨와 무안박씨, 영양남씨와 대흥백씨는 서로 상대 집안을 ‘선호하는 혼인 대상’ 즉 길반(吉班)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무안박씨와 대흥백씨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혼인빈도가 낮지만 영양남씨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직접 혼인을 교환한 사례가 많지 않더라도 두 가문은 ‘처가의 외가’ 또는 ‘외가의 외가’로 연결되는 것이다.
혼인을 통한 세 성씨 간의 이러한 연대는 원구마을에 입촌하는 초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자손들이 늘어나고 주거지가 확산되는 17세기 중엽 이후에도, 빈도가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지속되고 있음이 족보에 드러나고 있다.
[종족 경쟁을 넘어 마을 통합으로]
한국의 마을은 혈연에 바탕을 둔 종족체계와 지연에 바탕을 둔 공동체체계를 두 기둥으로 하여 구축되어 있다. 이 두 체계는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속성이 서로 달라서 항상 충돌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종족 정체성이 과도하게 표출되어 종족 간에 갈등이 발생하면 마을 공동체의 통합이 약화될 수 있다. 혼인은 이러한 두 체계를 조화롭게 연결시켜서 갈등을 완화하고 충돌을 예방함으로써 공동체적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원구마을의 주민들은 타 문중에 대해 언급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다. 과도한 경쟁의식이나 신분적 우월감이 표출되지 않도록 매우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중요한 조상들이 혼인으로 맺어져 서로가 내외손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비하나 폄하는 곧 자신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를 두고 ‘누워서 침 뱉기’라 표현하고 있다. 생활 과정에서 개별적인 갈등이나 마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갈등이 집단적인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고 쉽게 조정될 수 있는 것은 누적된 혼인으로 형성된 긴밀한 유대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혼인연대가 바탕이 되어 세 성씨가 공동으로 동제의 주체가 될 수 있었고, 종족간의 경쟁으로 출발한 줄다리기를 마을 공동체의 축제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원구마을 세 종족집단이 보여주는 이러한 혼인연대와 마을 통합의 사례는 한국의 종족집단과 종족마을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