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35
한자 驛院
영어공식명칭 Yeokwon (Traffic, communication and accommodations which Installed to the a traffic route)
이칭/별칭 역참,우역,역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소희

[정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교통·통신 기관과 숙박 시설.

[개설]

역(驛)은 전통시대 육상 교통로에 위치하여 공문서 및 군사정보 전달, 관원에 대한 숙박 제공, 역마(驛馬)의 공급, 관물(官物) 수송 등을 돕는 기관이었다. 영주 지역을 지나는 역도는 창락도(昌樂道)로 모두 4개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院)은 역과 역 사이에 있었던 숙박 시설로 관원과 여행객들이 쉬어 가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시대 영주 지역에는 약 13개소의 원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주의 역]

창락도에는 총 10개 역이 분속되어 있었는데, 영주 지역에는 창락역(昌樂驛)·죽동역(竹洞驛)·창보역(昌保驛)·평은역(平恩驛)이 설치되었다. 각 역의 위치와 규모는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창락역은 순흥-영천-예안-예천-안동으로 이어지는 창락도의 중심이 되는 역으로 순흥도호부[혁파 때는 풍기군] 서쪽 30리에 위치한다. 처음에는 종9품의 역승이 파견되다가, 이후에는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으며, 대마(大馬) 2필, 중마(中馬) 5필, 복마(卜馬) 9필, 역리(驛吏) 53인, 노(奴) 22인, 비(婢) 11인을 두었다.

순흥도호부 남쪽 10리에 있는 죽동역에는 중마 2필, 복마 8필, 역리 11인, 노 13인이 두어졌다. 영천군 서쪽 9리에 있는 창보역에는 대마 1필, 중마 3필, 복마 4필, 역리 26인, 노 10인, 비 3인이 있었으며, 영천군 동쪽 28리에 있는 평은역에는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 10필, 역리 97인이 있었다. 영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창락도의 역은 1896년(건양 1)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의해 폐지되었다.

[영주의 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영천군의 원으로는 효대원(孝大院)[군 동쪽 7리], 문수원(文殊院)[군 남쪽 11리], 금림원(金林院)[군 동쪽 36리], 승리원(乘利院)[군 서쪽 10리], 가이원(加耳院)[군 북쪽 20리], 장금원(長金院)[군 서쪽 23리], 덕산원(德山院)[군 남쪽 3리], 철겸원(鐵鉗院)[군 서쪽 3리]이 확인된다. 풍기군의 원으로는 남원(南院)[군 남쪽 2리], 산요원(山腰院)[군 서쪽 20리], 창락역남원(昌樂驛南院)[군 서쪽 11리], 순지원(蓴池院)[군 동쪽 10리], 인빈원(寅賓院)[군 남쪽 27리]이 확인된다. 반면,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가이원·산요원·창락역남원만이 1683년(숙종 9) 복설된 순흥도호부 소속으로 나타난다.

[변천]

조선 전기 정비된 역제(驛制)는 임진왜란 이후 파발제(擺撥制)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면서 봉수제(烽燧制)와 더불어 쇠퇴해 갔다. 개항기에는 근대적 우편제도 확립의 목적으로 우정국(郵政局)과 우사(郵舍)가 설치되면서 기존의 역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1896년 완전히 혁파되었다. 원의 경우 조선 전기까지 많이 활용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 혁파되고 사설 주막과 주점이 그 기능을 대신에 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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