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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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衛正斥邪運動 |
영어공식명칭 | Wijeongcheoksa Movement |
이칭/별칭 | 척사위정운동,척사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80년 11월 1일 - 위정척사운동 영천향교 통문 발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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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880년 11월 26일 - 위정척사운동 안동도회 개최 |
전개 시기/일시 | 1881년 2월 26일 - 위정척사운동 제1차 만인소 |
전개 시기/일시 | 1881년 3월 4일 - 위정척사운동 제2차 만인소 |
전개 시기/일시 | 1881년 3월 6일 - 위정척사운동 제3차 만인소 |
전개 시기/일시 | 1881년 3월 24일 - 위정척사운동 제4차 만인소 |
발생|시작 장소 | 위정척사운동 시작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명륜길 76[하망동 167] |
관련 인물/단체 | 정집교|박붕수|김정규|김석규/영천향교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유림이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전개한 운동.
[개설]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은 “중화(中華)의 명맥을 보전하여 조선이 금수가 되는 것을 막고, 세계의 중심은 화맥을 계승한 조선에 있다.”라는 위정척사론의 기치로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유림이 집단으로 전개한 상소운동이다. 특히 영주 지역 유림은 1881년(고종 18)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의 하나로 전개된 이른바 영남만인소운동(嶺南萬人疏運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영남 유림의 집단적인 상소운동은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책략』에는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은 청, 일본,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책략이 제시되어 있었다. 고종이 이러한 『조선책략』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추진하자, 전국의 유림이 조직적으로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1880년 11월 『조선책략』을 비판하고, 복합(伏合)을 촉구하는 척사 통문이 도산서원과 영천향교[지금의 영주향교]에서 발송되면서, 영남만인소운동으로 대표되는 1881년 신사척사운동이 시작되었다.
[경과]
1880년 11월 26일 안동향교에 도내 유생 800여 명이 참석하여 도회(道會)를 개최하였고, 이 자리에서 이만손(李晩孫)을 소수(疏首)로 추대하였다. 조사(曺司)에는 최시술(崔蓍述)·유필영(柳必永)·권술봉(權述鳳)·김현휘(金絢輝)·이병호(李炳鎬), 공사원(公事員)에 김석규(金碩奎)·김양진(金養鎭)·김상흠(金尙欽)·박재홍(朴載洪)·하현원(河顯源) 등이 선정되었다. 한편 경상우도에서는 황난선(黃蘭善)·이진상(李震相)·송인호(宋寅濩) 등이 경상도 성주의 신광사(神光寺)에 모여 척사 통문을 발송하였고, 1880년 12월 15일 개령향교에서 모임을 열어 척사운동에 참여하였다.
경상좌·우도에서 모임을 연 유생들은 만인소의 도회소를 상주의 산양[지금의 문경시 산양면]으로 정하였다. 1881년 정월 20일경부터 각처에서 만인소에 동참하려는 유생들이 산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산양은 지리적으로 조령에 가까워 영남 인사들이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쳐야만 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1881년 2월 4일 이만손을 소수로 영남 유생들은 산양도회를 출발하였다. 그리고 1881년 2월 18일 소유 27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복합상소에 들어갔다. 1881년 2월 23일 영주 순흥의 유생 등이 참여하면서 소원들은 400여 명에 이르렀다. 1881년 2월 26일 만인소가 고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후 1881년 3월 4일 안동의 김조영(金祖永)을 소수로 한 제2차 만인소, 1881년 3월 6일 영주의 김석규(金碩奎)를 소수로 한 제3차 만인소, 3월 24일 안동의 김진순(金鎭淳)을 소수로 한 제4차 만인소가 복합상소로 전개되었다.
복합상소에서 영주 지역 유림은 안동·상주 지역 유림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위정척사소초(衛正斥邪疏草)」에 의하면, 영주 지역에서 참가한 유생들은 모두 24명[영천 20명, 풍기 2명, 순흥 2명]으로 나타나는데, 안동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치이다. 이때 참여한 영주 지역 유림의 면면을 살펴보면, 장의(掌議) 김석규(金碩奎)[우금]·황조하(黃肇夏)[백동], 소색(䟽色) 김규영(金奎永)[오록], 제색(製色) 안호중(安鎬重)[구원]·김정규(金鼎奎)[우금], 택소(擇䟽) 김휘문(金輝文)[귀정]·송태인(宋泰仁)[광승], 사소(寫䟽) 이용하(李龍河)[오천]·장효진(張孝鎭)[금강]·권대기(權大夔)[소노], 진재학(秦載學)[생현]·김우성(金禹成)[신천]·전수발(全秀發)[망동]·김교탁(金敎鐸)[망동]·김종하(金宗夏)[구천], 배소(陪䟽) 김운흠(金雲欽)[오록]·박홍수(朴泓壽)[반곡]·송인영(宋仁榮)[토계], 도청(都廳) 권대용(權大鎔)[사례]·김두석(金斗錫)[지천]·이병룡(李炳龍)[신천]·홍용선(洪鎔善)[평곡]·김상진(金尙鎭)[한저]·오재근(吳在根)[초곡]이 확인된다.
한편, 만인소가 올라가는 과정에서 영주 지역 유림은 안동의 유림보다 먼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안동 유림은 1880년 11월 초1일 도산당회(陶山堂會)에서 척사 통문을 발송하여, 1880년 11월 25일 안동 숭보당(崇報堂)에서 도회를 열어 날짜를 정하고 복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영주 유림은 이보다 앞선 1880년 10월 29일 영주의 황조동에서 줄포의 정집교(丁集敎)와 성곡의 박붕수(朴朋壽), 김정규 등이 한자리에 모여 시사에 대해 언급하고, 1880년 11월 1일 영천향교에서 통문을 발송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11월 1일 김석규가 참여하여 논의는 더욱 격렬하게 되어, 열읍의 향교와 서원에 통문을 발송하게 되었다.
물론 도산통문도 1880년 11월 1일 발송되었지만, 영주와 안동이 어떤 협의를 거쳐 발송한 것은 아니었고 우연의 일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영남 북부 지역의 척사 분위기를 보여준다. 얼마 뒤 영주에서도 도산통문을 받았고, 1880년 11월 25일 안동에서 회합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영주의 유생 김석규·김정규 등이 안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1880년 11월 25일 영주 유생을 비롯한 도내 유생들이 안동에 도착하여 안동 남문 안에 도소를 정하였다. 1880년 11월 26일 운집한 유생들은 약 800명에 이르렀다.
영주 지역의 유생으로 영남만인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석규와 김정규가 있다. 영주 두암리(斗巖里) 출신 김석규는 이만손을 소수로 하는 제1차 만인소에서 부소수로 차임되었으며, 김조영을 소수로 하는 제2차 만인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제3차 만인소에서는 소수로 추대되어 척사소를 올렸다가 덕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석규는 제3차 소수로 추대되어 척사소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김석규는 이동인(李東仁)이 김홍집과 일본에 가서 『조선책략』을 가져온 죄를 극렬하게 성토하였다.
한편, 영주 두암리 출신 김정규는 어려서 족형인 김석규에게 경전을 배우다가 1865년 나이 27세에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 수학하였다. 그런 가운데 1881년 김석규가 영남만인소의 소두가 되자 좌우에서 보위하며 『소행일록(疏行日錄)』을 남기기도 하였다.
[결과]
영남만인소운동은 1881년 8월 고종을 몰아내려다 발각된 안기영(安驥永) 사건이 일어나면서 점차 수습되었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차례대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나아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개화 정권에 대한 유림의 불만은 높아져 갔다. 이러한 불만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개화 정권의 단발령 시행으로 폭발하여, 1895년 을미의병으로 이어진다.
[의의와 평가]
위정척사운동은 외세 침략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유생들의 국권수호운동이다. 안으로는 내정 개혁, 밖으로는 서양 열강의 무력 침략과 서구 사상의 수용에 반대하는 내수외양책(內修外攘策)으로 개항기 구국운동의 하나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