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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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영어공식명칭 | Open Port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 대한제국기까지 영주 지역의 역사.
[개설]
1876년(고종 13) 2월 일본과 강제로 체결한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안으로는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며,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을 극복하여 자주적인 사회를 건설해야만 하는 반제 반봉건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은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과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대한제국기[1897~1910] 광무개혁,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으로 이어진 위로부터 개혁, 1894년 동학농민운동, 1895년부터 전개된 의병운동, 대한제국기 광무농민운동 등 밑으로부터 개혁을 통한 근대적인 변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영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소백산과 태백산 남쪽 내륙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개항 이후 대내·외적인 변화에 비교적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1881년(고종 18) 영남만인소, 1894년 동학농민운동, 1895년 전기의병에서 시작되어 후기의병으로 이어진 의병전쟁까지 영주 지역은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행정구역 개편]
영주 지역의 행정구역은 1895년 8도 체제가 23부제로, 1896년 13도제로 변경되면서 위상이 변화된다. 우선, 조선 초기부터 이어져 온 영천군(榮川郡)은 23부제 하에서 안동부 관할 영천군이 되었고, 13도제로 바뀌면서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이때 순흥도호부와 풍기군도 영천군처럼 안동부 관할 순흥군과 풍기군에서 경상북도 관할 순흥군과 풍기군으로 편제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따라 일부 면들이 봉화군에 이속되었다.
[위기의식의 고조와 위정척사운동]
19세기 중반까지 안으로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중세 국가의 말기적 현상이 표출되었으며, 밖으로는 서구 사상의 유입과 외세 침략으로 위기의식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특히 1862년(철종 13) 삼남지방[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농민항쟁과 1864년(고종 1) 동학 교주 최제우 처형 이후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동학,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외세 침략 등은 기존 유림에게 어떠한 대응을 요구하였다. 이에 영주 지역에서도 위기의식은 고조되어, 영주 출신 많은 유림이 만인소로 대표되는 1881년 신사척사운동에 참여하거나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의병운동]
1894년에 일어난 갑오의병,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1895년 을미의병,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준 식민지 상태가 되자 이에 맞서 일어난 1905년 을사의병, 제2차 한일협약[정미7조약] 전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1907년 정미의병은 경북 북부 지역에서 광범하게 전개되었는데, 특히 소백산과 태백산을 근거지로 한 영주 지역은 의병 항전의 중심에 있었다.
을미의병 시기에는 1896년 2월 6일 창의하였던 김우창(金禹昌)의 영천의진(榮川義陣), 1896년 3월 창의하였던 홍종선(洪鍾善)의 순흥의진(順興義陣), 1896년 3월 14일 창의하였던 김교명(金敎明)의 풍기의진(豐基義陣) 등이 모두 영주 지역에서 창의해 활동했다. 영주 지역에서 창의하였던 의병부대들은 안동의진(安東義陣)을 비롯한 경북 북부 지역 각처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태봉전투(胎峯戰鬪)를 수행하였다.
을사의병 시기에는 단양의병(丹陽義兵)과 호좌의병(湖左義兵)이 영주 지역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정미의병 시기에는 문경 출신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이 거느린 의병진과 이강년의 뒤를 계승한 그 휘하 장령들이 유격전을 통해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미의병에서 주목되는 의병부대는 김상태 부대(金相泰部隊)·최성천 부대(崔聖天部隊)·김운선 부대(金雲仙部隊)·금달연 부대(琴達淵部隊) 등인데, 이들은 경북 북부 지역의 소백산과 태백산을 근거지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계몽운동]
영주 지역의 계몽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소극적인 편이었다. 영주 지역의 보수적인 유생들 대부분은 의병운동에 참여하였고, 일부 유생이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계몽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유생들이 서울에 올라가 활동하면서 신문물과 신사상을 접하는 과정에서 사상적으로 변신을 한다. 그중에서 영주 출신 유생으로 박교영(朴敎榮)이 충의사(忠義社)에 참여하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자강회의 지방지회가 전국 각처에 설립되어 유력한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참여하였고, 1907년 11월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가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영주 지역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일어난 움직임은 없었고, 교남교육회에 이르러 영주 지역 출신 선각적 유생들의 활동이 나타난다.
1908년 3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 출신 선각적인 인사들이 상호 간 친목과 계몽사상의 보급을 목표로 교남교육회를 조직하였을 때, 영주·순흥·풍기 등 영주 지역 출신의 유생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이리하여 영주 지역의 계몽운동은 교남교육회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에 의해 신교육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고, 나아가 신교육기관으로써 영주 지역에 소흥학교(紹興學校)·안정학교(安定學校)·강명학교(綱明學校)·조양학교(朝陽學校)·내명학교(內明學校) 등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