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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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林團-獨立請援運動 |
영어공식명칭 | Yoorimdan Patriotic Deed Participation |
이칭/별칭 | 유림단 의거,파리장서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영주 지역 유림 대표들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한 독립운동.
[개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을 대표로 한 영남 유림과 김복한(金福漢)[1860~1924]을 대표로 한 호서 유림 등 137명이 유림단의 이름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냈다. 이때 영주 지역 출신으로 참가한 인사는 김동진(金東鎭)[1867~1952], 김택진(金澤鎭)[1874~1961], 정태진(丁泰鎭)[1876~1960] 3인이다.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은 1919년 4월 12일 경북 성주 지역 만세시위운동 과정에서 드러나 서명자 대부분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명단에서 유림 대표는 빠져 있었다. 이것은 조선 전통사회의 지배층을 자부해 온 유림에게는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또 3.1운동 발발 직전 정당 대표 이완용(李完用)[1858~1926], 유림대표 김윤식(金允植)[1835~1922] 등의 명의로 한국 유림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진정서로 「독립불원서」라는 문건이 만들어져 일본 정부에 제출하려 했던 음모가 폭로되었다. 유림 측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것도 허구지만, 유림의 대표가 김윤식이라는 데에 격분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유림의 진정한 뜻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별도 독립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경과]
1919년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성 문제와 김윤식 명의의 「독립불원서」의 유림 대표성 문제로 유림은 대단히 격분하였다. 서울의 유림은 유림 측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담은 서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이라 하는데, 영남 유림의 종장 곽종석을 대표로 추대하였다.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는 곽종석의 문인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전면에 나섰다. 먼저 성주 유생 장석영(張錫英)[1851~1929]에게 부탁하여 「독립청원서」를 짓게 하고, 이것을 경남 거창 곽종석의 집에서 김창숙과 곽종석이 일부 수정을 하여 원본으로 확정하였다. 전국 유림 대표자 서명은 경중 유림이 지역을 분담하여 직접 받았다. 경북 지역은 김창숙이 대표자들의 서명을 받았다. 영주 지역에서는 김동진·김택진·정태진 3인이 유림대표로 서명하였고, 전국적으로 120명의 서명자를 확보하였다. 김창숙이 「독립청원서」와 서명자 명단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호서 유림도 김복한(金福漢)[1860~1924]의 문인 임경호(林敬鎬)[1888~1945]가 김복한의 지시로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사실을 알고, 서로 만나 이를 합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곽종석본을 원본으로 하되, 호서지방 서명자 17인을 합쳐 모두 137인을 서명자로 하는 「독립청원서」를 제출본으로 확정하였다. 김창숙은 이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떠났다.
[결과]
영주 지역의 인사 김동진·김택진·정태진 3인을 비롯한 유림대표들은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김창숙을 상하이로 보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창숙은 「독립청원서」를 다시 영문판과 한문판으로 여러 본을 복사하여,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1881~1950]과 파리강화회의 의장 및 각국 공사관 등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1919년 4월 2일 경북 성주 지역 만세시위운동 전개 과정에서 발각되어 「독립청원서」 서명자들이 연달아 체포되었다. 영주 지역의 김동진·김택진·정태진 3인도 일본 경찰에 잡혀 한동안 고초를 겪었으나, 얼마 후 풀려났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에서 존경받는 인사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악화할 것을 우려해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을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은 말 그대로 유림의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이 제국주의 일본을 경고한 독립선언이었다면,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은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여 한국인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전 세계만방에 드러내었다는 의의가 있다. 여기에 영주 지역에서도 세 사람이나 참여함으로써, 선비의 고장 영주의 기개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