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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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浮石寺祖師堂壁畵 |
영어공식명칭 | Mural Painting in Josadang Shrine of Buseoksa Temple |
이칭/별칭 | 부석사벽화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6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박물관에 있는 고려 후기 불화.
[개설]
부석사 조사당 벽화(浮石寺祖師堂壁畵)는 부석사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고려시대 벽화로 현재 부석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두 6폭인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내용은 제석천과 범천·사천왕 등의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부석사 창건자인 의상(義湘)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조사당의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보수를 빙자해서, 부석사 조사당 벽화를 벽체에서 분리하여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부석사 경내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섯 폭으로 분리된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한 폭의 크기는 가로 약 75㎝, 세로 약 205㎝로 화면의 손상이 심한 편이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에는 천계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최고의 호법신인 범천·제석천과 이들 천신에게 직접 통제되는 사천왕이 그려져 있어 의상대사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듯하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 중 범천은 오른쪽을 바라보는 측면관으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얼굴 뒤로 원형의 두광이 희미하게 보이며 앞으로 약간 내민 배 위에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넓적한 얼굴에 긴 눈과 작은 입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범천과 마주 보는 측면관을 취한 제석천은 아름답고 단아한 얼굴, 좁은 어깨와 날씬한 체구 등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로서 화려한 보관을 쓰고 합장한 보살형이다.
풍만하거나 우아한 귀부인 같은 느낌을 주는 범천이나 제석천과는 달리 수호의 임무를 맡은 사천왕은 그들의 성격처럼 굴곡이 심한 곡선을 구사하여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쪽의 수호신인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새털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왼손에 칼을 든 채 악귀를 밟고 서 있으며,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오른손을 배 위에 얹고 왼손으로는 화살을 잡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무사상이다.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두 발로 악귀를 단단히 누르고 서서 칼을 잡고 있으며,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한 발을 들어 올려 악귀를 밟고 있는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범천과 제석천의 우아하고 유려한 모습과 사천왕상의 위풍당당한 기세가 능숙한 필치와 세련된 색감으로 표현되어 있어 고려 불화의 독특한 품격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징]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원래 조사당 입구에서부터 사천왕과 제석천·범천의 순으로 배치되어 석굴암과 비슷한 구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들은 부처님 대신 부석사 창건주이자 화엄종의 조사인 의상을 외호하는 신장들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의상은 부처님과 동격으로 존숭되었다. 이것은 화엄종(華嚴宗)의 수사찰(首寺刹)에서 신라 화엄종의 초대 조사에 대한 존숭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 주는 좋은 예이다. 이것은 영주 부석사 조사당이 본법당보다 높은 데 위치한 것과 함께 화엄종에서는 초대 조사를 부처보다 더 받들어 모셨던 것을 시사하는 중요한 회화 자료이다.
현재 부석사 조사당 벽화 여섯 폭은 도난과 망실을 방지하고 그림 보존을 위해 유리관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 사찰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제작 연대는 지금까지 조사당 묵서명의 기록대로 1377년(우왕 3)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도리 하단에 1201년(신종 4)에 개채한 것을 1493년(성종 24)에 개체 하였다고 한 묵서명으로 보아 1377년 제작설에 대한 견해는 재검토되고 있다. 또 부석사 조사당 벽화가 몇 차례 보수되어 원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