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46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Rule Era
이칭/별칭 왜정시대,국권피탈기,식민지시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에게 식민통치를 당했던 영주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은 식민지 수탈 상황 속에서 전개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영주 지역은 일제의 식민정책 기조에 따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주군이 새로 생겼으며, 1940년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또 1910년대 일제의 무단 폭압정치 하에서 치안을 담당하던 헌병경찰제도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 보통경찰제도로 전환하였으나 식민지 지배를 관철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산업정책은 조선인 산업자본의 발달을 억제하여, 조선을 식량공급기지로 편성하려는 정책을 세움에 따라 영주 지역은 농업 중심의 산업정책이 지속되었다. 반면 상업이나 공업은 거의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자생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민족의식의 성장과 관련된 민족운동으로써, 독립운동·청년운동·농민운동 등이 일제의 억압과 탄압을 받았다.

[행정구역의 변화와 일제의 통치기구 확충]

1910년 조선을 강점하는 데 성공한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행정 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에서 동리는 개별 농가의 한계를 보완하는 공동 조직이자 자치 기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대체로 지역에서 명망 있는 계층의 주도 아래 운영되었다. 이에 일제는 지역 명망가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다. 1914년의 군·면·동리 통폐합은 이러한 목표와 갚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일제는 식민정책 기조에 따라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였고, 그 과정에서 풍기군·순흥군·영천군영주군으로 통합되었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지방행정 구역의 개편에 따른 것으로 군과 면의 대대적인 통폐합을 통해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고, 통치 경비를 절감함에 목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영주군은 모두 13개 면으로 편성되었으며, 1929년에는 과거 풍기군에 속해 있던 상리면(上里面)과 하리면(下里面)이 예천군에 편입되어 영주군은 11개 면으로 편제되었다. 1940년 11월 1일에는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하였다.

1910년대 일제의 무단 폭압정치 하에서 치안을 담당하던 헌병경찰제도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 보통경찰제도로 전환되었다. 1915년경 영주 지역에는 영주헌병분대가 있었고, 그 예하 5개소의 순흥·풍기·내성·재산·춘양·서벽헌병파견소, 7개소의 소천·현촌·반구·송리·구천·봉화·현동·석보헌병출장소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1919년 하반기 보통경찰제도로 개편되면서 영주경찰서와 그 예하 풍기·부석·순흥·평은·장수·단산·안정·이산·문수주재소 등이 설치되었다.

[산업의 변화]

1. 농업

농업 부문에서 일제가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은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을 공포하고 본격적인 토지수탈 작업에 들어갔다. 1920년대에 들어 일제의 수탈정책은 더욱 본격화되어 두 차례에 걸친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였다. 제1차 산미증식계획에서는 농사 단체를 통합하여 농사개량사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각종 산업 단체를 농회로 통합·정리해 나갔다. 영주군농회는 농업·축산업·양잠업·인삼농업 등 분야에 걸친 조합을 결성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기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36년경 영주군의 총인구는 14,500호, 인구는 75,350명, 농경지 16,660정보[약 165㎢]였다. 그중 논이 8,600여 정보[약 85㎢], 밭이 8,600여 정보로 논과 밭의 면적은 서로 비슷하였다. 농업 생산이 주요 산업이었다. 축산업은 1936년경 대부분 소[牛]가 가축으로 사육되고 있는데, 모두 5,241두로써 농가 10호당 평균 4.5두를 보유하고 있다. 양잠업은 1936년경 총생산량이 4,000석으로 20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 농가 부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주군농회에서는 양잠 교육기관으로 여자잠업전습소를 설치하여 양잠 교육을 시행하였다. 인삼농업은 1911년 12월 풍기인삼조합이 설립되어 재배방법의 개선, 생산품의 검사 등을 실시하였고, 이후 영주 지역의 특산품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2. 상공업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는 영주·금광·반구·풍기·순흥·옥대·소천 등 7개 시장이 있었다. 1년 동안 총 398회의 시장이 열리며, 총 거래액은 74만 6천 원에 달했다. 특히 영주 지역의 영주·풍기·장수·부석 네 곳에서 열리는 우시장은 영주 지역의 소가 주로 거래되지만, 인근 경상북도 예천과 봉화, 경기도·강원도·충청도 등에서 모인 소도 3% 정도 거래되었고, 1년간 총 매매액은 33만 원 정도에 이르렀다.

영주 지역의 대표적인 상사회사에는 영주흥업주식회사(榮州興業株式會社)가 있다. 영주흥업주식회사는 1933년 3월 현재로 자본금 3만 원이었으며, 사장은 엄주호(嚴柱浩), 전무는 김길준(金吉濬)이었다. 주된 영업부문은 금고업·창고업·운송 및 기타 노력 청부·위탁판매 등이었다. 1933년 현재 거래 규모는 현미 3만여 가마, 대두 및 잡곡 1만 5천여 가마로 확인된다.

영주 지역의 공업생산은 양조업을 비롯하여 견포·마포·면포 등 기업이 부업적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양조업은 1927년 이후 16개 양조공장으로 통폐합되었다. 그 경영형태는 회사와 조합이 각각 1개, 개인 경영이 14개이다. 그중 영주양조주식회사와 풍기주조조합이 대표적이다. 영주양조주식회사는 1928년 4월 자본금 5만 원으로 설립되었고, 1936년 당시 생산 규모는 탁주 2,000석, 약주 200석, 국자 20만 개에 달하였다. 풍기주조조합은 1928년 설립되어 1931년 대대적인 내부 개편을 통해 생산 규모를 늘렸다. 1935년 현재 탁주 1,700석, 약주 500석 정도이다.

기업은 1924년 기업조합이 설립되어 염색·표백·정련 등에 걸친 개량 기구가 보급되었다. 1926년부터 견포 및 마포를 검사하여 그 품질을 개선하고, 나아가 원료 구입과 제품 판매를 알선하였다. 1934년 당시 총생산액은 면포 3만 4천 원, 견포 6만 4천 원, 마포 12만 팔천 원이며, 총 1,946호가 제조에 종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 치하의 교육]

대한제국기 신교육구국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설립된 학교로는 흥주소학교(興州小學校)[1906년 설립]를 계승한 사립소흥학교(立紹興學校)[1906년 설립], 사립안정학교(私立安定學校)[1908년 5월 20일 설립], 사립강명학교(私立綱明學校)[1903~1909년경 설립], 사립조양학교(私立朝陽學校)[1909년 설립], 사립내명학교(私立內明學校)[1910년 4월 5일 설립]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과 1915년 제정된 「사립학교규칙」과 1911년 8월 제정된 「조선교육령」이 공포되면서 사립소흥학교는 1911년 7월 24일 폐교됨과 동시에 공립순흥보통학교로 변경되어 개교하였으며, 1938년 4월 1일 순흥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 4월 1일 순흥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사립안정학교는 1912년 4월 1일 폐교되고 공립풍기보통학교로 변경하여 개교하였다. 1937년 6월에는 풍기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가 창립되었으며, 1938년 4월 풍기공립심상소학교를 거쳐 1941년 4월에 풍기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사립강명학교는 1911년 「조선교육령」 공포로 폐교되어 공립영주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38년 4월 1일 영주서부심상소학교로, 1942년 4월 1일 영주서부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영주 지역 독립운동의 전개]

1910년대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 독립운동은 1913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 주목된다. 대한광복단은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군자금의 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로 발전하였는데, 이때 영주에서 설립된 대동상점(大同商店)은 국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0월 풍기 출신 강택진(姜宅鎭)이 박시묵(朴時黙)·박상목(朴尙穆) 등과 함께 조선13도총간부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부하였다. 그 외 최익한(崔益翰)의 독립군자금모집사건,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군자금모집사건은 각각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서로군정서에 보낼 군자금모집사건으로 주목된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였는데, 영주 지역에서는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하리면 만세시위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을 계기로 한편으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 이른바 파리장서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 영주 지역의 유생으로는 김동진(金東鎭)·김택진(金澤鎭)·정태진(丁泰鎭) 등 3인이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국내 독립운동은 1925년 김창숙 등이 일으킨 제2차 유림단의거가 주목된다. 여기에는 영주 출신 송영호(宋永祜)·송재호(宋在祜) 형제가 참여하였고, 그 외 김동진·박제형(朴在衡) 등이 연루되었다. 한편, 청년운동·농민운동, 신간회근우회를 통한 항일민족협동전선운동이 영주 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청년운동은 1920년 6월 결성된 영주청년회, 1920년 8월 결성된 풍기기독청년회, 1924년 2월 결성된 풍기청년회 등의 활동이 주목된다. 1920년대 중반에는 청년운동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발전하면서 1926년 1월 철우단, 1926년 11월 영주청년동맹이 창립되어 통일적인 조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927년 11월 신간회 영주지회, 1929년 4월 근우회 영주지회의 결성되면서 영주 지역에서도 항일민족협동전선운동의 형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운동은 1920년 초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 영주지회, 1923년 3월 결성된 풍기소작조합, 1929년 3월 결성된 영주농민조합 등이 주도하였다.

1930년대 이후 전시 파시즘 체제하에서 영주 지역의 국내 독립운동은 위축되는 현상을 보였으나 공출 거부, 유언비어 유포 등의 소극적인 저항을 통해 불만을 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1939년 영주 출신 이임태(李林泰)의 유언비어 유포 사건 등이 주목된다. 국외에서는 박진양(朴震陽)·박태양(朴泰陽) 형제가 1934년 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국인 훈련반에서 교육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응락(李應洛)장석창(張錫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 외 1940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독립운동을 벌인 기독교 목사 김은석(金恩錫) 등의 활동도 주목된다. 한편, 1932년 4월 영주군공산주의자협의회, 1932년 10월 적농재건투쟁위원회, 1935년 5월 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 등이 결성되어 사회주의적 경향의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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