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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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檜茂 |
영어공식명칭 | Park Hoe-mu |
이칭/별칭 | 중식(仲植),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75년 - 박회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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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박회무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박회무 황산도찰방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64년 - 박회무 통정대부 가자 |
몰년 시기/일시 | 1666년 - 박회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86년 - 박회무 한천서원 제향 |
거주|이주지 | 박회무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
묘소|단소 | 박회무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선양리 |
사당|배향지 | 한천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문정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반남(潘南) |
대표 관직 | 의금부도사|황산도찰방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박회무(朴檜茂)[1575~1666]는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의금부도사·황산도찰방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이후 스스로 ‘숭정야로(崇禎野老)’라고 부르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나갔다.
[가계]
박회무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식(仲植),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이다. 아버지는 의금부도사를 지낸 박녹(朴漉)[1542~1632], 어머니는 생원 허사렴(許士廉)의 딸 정부인 김해허씨(金海許氏), 할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박승임(朴承任)[1517~1586]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박형(朴珩)[1479~1549]이다. 부인은 예문관검열을 지낸 김해(金垓)[1555~1593]의 딸 정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활동 사항]
박회무는 정구(鄭逑)[1543~1620]와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에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바치고,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향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의 사람들이 박회무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의금부도사로 있으면서 인조를 강화도까지 호종하였으며, 상소문을 올려 상벌과 군율을 엄격히 할 것과 송나라의 일을 들어 전란을 방비할 대책을 건의하였다.
1636년(인조 14) 인조가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박회무는 ‘교화에 힘쓸 것, 군율을 엄격히 할 것, 어진 인재를 가려 쓸 것, 쓸데없는 비용을 줄일 것, 재해를 구원하고 백성을 구휼할 것, 서북 변경의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정예병을 양성할 것’ 등의 내용이 담긴 상소문을 올렸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풍 경계에서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이후 박회무는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 전념하였다. 또 스스로 ‘숭정야로’라는 네 글자를 침상 벽 위에다 써 놓았고, 명나라 신종의 기일마다 서쪽을 향해 통곡하였으며, ‘숭정(崇禎)’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평소 뜰에 소나무·회나무·매화나무·대나무·연꽃·국화꽃을 심고 이를 벗 삼으며 소요하였기에 스스로 호를 ‘육우(六友)’라 하였다.
박회무는 1641년 음직으로 황산도찰방에 제수되었다. 70세가 될 때까지 강학을 그치지 않았으며, 김응조(金應祖)[1587~1667] 등과 교유하였다. 1664년(현종 5) 90세가 되어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묘소]
박회무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선양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회무는 1786년(정조 10) 건립된 한천서원(寒泉書院)[지금의 영주시 문정동]에 제향되었다. 한천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 한편,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고현동 귀내마을에는 육우당이 후손들에 의해 새롭게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