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29
한자 朴承任
영어공식명칭 Park Seung-im
이칭/별칭 중보(重甫),소고(嘯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7년연표보기 - 박승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박승임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박승임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박승임 식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4년 - 박승임 사가독서
활동 시기/일시 1545년 - 박승임 홍문관저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47년 - 박승임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51년 - 박승임 현풍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57년 - 박승임 경상도재상어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박승임 풍기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66년 - 박승임 진주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박승임 제술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9년 - 박승임 동지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박승임 승정원도승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74년 - 박승임 경주부윤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77년 - 박승임 여주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81년 - 박승임 춘천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박승임 사간원대사간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박승임 창원부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86년연표보기 - 박승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15년 - 박승임 향현사[귀강서원] 제향
출생지 박승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승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정동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박승임 부임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부임|활동지 박승임 부임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박승임 부임지 - 경상남도 진주시
부임|활동지 박승임 부임지 - 경상북도 경주시
부임|활동지 박승임 부임지 - 경기도 여주시
묘소|단소 박승임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산27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향현사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반남(潘南)
대표 관직 경주부윤|사간원대사간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박승임(朴承任)[1517~1586]은 문과 급제 후 경주부윤, 사간원대사간 등의 관직을 지냈다.

[가계]

박승임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이다. 아버지는 진사 박형(朴珩), 어머니는 김만일(金萬鎰)의 딸 정부인 예안김씨(禮安金氏)[선성김씨(宣城金氏)], 할아버지는 부사직을 지낸 박숙(朴䃞), 증조할아버지는 홍주판관을 지낸 박병균(朴秉均)이다. 부인은 집의를 지낸 권오기(權五紀)[1463~?]의 딸 정부인 예천권씨(醴泉權氏)이다. 박승임반남박씨 가문은 할아버지 박숙 대에 안동 지역으로 내려왔고, 아버지 박형이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두서리(斗西里)[지금의 영주시 영주동]에 정착하게 되면서, 그 후손이 지금의 영주시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박승임은 1517년(중종 12) 경상도 영천군 두서리에서 출생하였다. 1540년(중종 35) 거행된 생원시와 진사시, 식년시 문과에 모두 급제하였다. 1544년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는데, 1544년 정9품 벼슬로는 드물게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를 하였다. 1545년(인종 1) 홍문관저작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홍문관 관원과 함께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신원을 건의하는 차자를 올렸다. 1547년(명종 2) 성균관직강, 예조정랑 등에 올랐는데, 이 무렵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나 조정에서 명망 있던 사림 인사들이 화를 입고 있었다. 박승임도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유배된 권벌(權橃)[1478~1548]과 교분이 두텁다고 하여, 윤원형(尹元衡)[1503~1565] 일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1551년(명종 6) 명종의 명으로 다시 서용되어 현풍현감으로 부임하였다.

박승임은 1557년 특별히 경상도재상어사로 임명되었으며, 1558년에는 풍기군수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상부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에 봉안된 안향(安珦)[1243~1306]의 영정을 새로 그리게 하였으며, 호조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1565년(명종 20) 승문원판교로 있으면서 권신 윤원형의 유배를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566년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는데, 이곳에서 향촌 교화를 위하여 향약과 향음주례를 거행하였다. 1567년 명나라 융경제의 즉위에 따라 조사(詔使)가 조선에 파견되자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박승임은 1569년(선조 2) 동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에서 조선 사신에 대한 위차(位次)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박승임이 명나라 예부주사에게 글을 올려 이를 바로잡았다. 1573년 승정원도승지 등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선조는 경회루에서 ‘금일즉사(今日卽事)’라는 시제로 신하들에게 칠언율시를 짓게 하였는데, 박승임은 삼중(三中)의 평가를 받고 숙마(熟馬)와 대록피(大鹿皮)를 하사받았다. 또 주강에서는 노비종모법과 양천교혼의 폐단을 건의하였다.

박승임은 1574년 경주부윤에 제수되었고, 1577년에는 여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여주목사 재임 중 치적을 남긴 공으로 선조에게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581년(선조 14) 춘천부사로 부임하였고, 1583년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때는 동인과 서인 간의 갈등이 심해져, 동인 박근원(朴謹元)[1525~1585], 송응개(宋應漑)[1536~1588], 허봉(許篈)[1551~1588]이 이이(李珥)[1536~1584]를 탄핵하다 귀양 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동인으로 좌정한 박승임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박근원 등을 옹호하였지만, 도리어 서인의 공격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선조의 특명에 따라 창원부사로 부임하였다. 1584년 체직되었고, 1586년 영천군 반곡(蟠谷)[지금의 영주시 문정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박승임은 영주 지역의 대표적인 이황(李滉)[1501~1570] 문인이다. 김륵(金玏)[1540~1616], 김륭(金隆)[1549~1593], 이개립(李介立)[1546~1625], 임흘(任屹)[1557~1620], 김중청(金中淸)[1566~1629], 권두문(權斗文)[1543~1617], 김개국(金盖國)[1548~1603], 배응경(裵應褧)[1544~1602], 금복고(琴復古)[1549~1632] 등이 박승임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또 문장에도 뛰어나 1572년 조정에서 유희춘(柳希春)[1513~1577]은 선조에게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박승임을 거론하기도 했다. 저술로는 『성리유선(性理類選)』과 10권 5책의 『소고집(嘯皐集)』이 전한다.

[묘소]

박승임의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승임은 1615년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향현사는 박승임을 비롯해 김담(金淡)[1416~1464], 김륵, 김영조(金榮祖)[1577~1648]를 제향하는 사우였는데, 훗날 귀강서원(龜江書院)[영주시 휴천동]으로 승격되었다. 귀강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