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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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澐 |
영어공식명칭 | O Un |
이칭/별칭 | 죽유(竹牖),율계(栗溪),백암(白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순한 |
출생 시기/일시 | 1540년 - 오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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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오운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오운 성균관학록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오운 임진왜란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오운 경주부윤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오운 청송부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617년 - 오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86년 - 오운 산천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69년 - 오운 남계사 제향 |
출생지 | 오운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
묘소|단소 | 오운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
사당|배향지 | 남계사 - 경상북도 영주시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고창(高敞) |
대표 관직 | 청송부사|경주부윤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문신.
[개설]
오운(吳澐)[1540~1617]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청송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가계]
오운의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대원(大源), 호는 죽유(竹牖)·율계(栗溪)·백암(白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오석복(吳碩福)[1455~1533]으로 만년에 의령현감을 지낸 뒤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정착하게 되면서 함안 입향조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전의현감을 지낸 오언의(吳彦毅)[1494~1566]이고, 이황(李滉)[1501~1570]의 숙부인 이우(李堣)[1469~1517]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버지는 오수정(吳守貞)[1510~1574]이며, 어머니는 취우정(聚友亭) 안관(安灌)[1491~1553]의 딸이다. 안관은 고려 말 문신 안축(安軸)[1282~1348]의 후손이다. 부인은 허사렴(許士廉)의 딸 김해허씨(金海許氏)인데, 허사렴은 이황의 큰처남이 된다.
[활동 사항]
오운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당시 김해의 산해정(山海亭)에서 강학하고 있던 조식(曺植)[1501~1572]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2년 뒤인 1560년(명종 15)에는 이황의 제자로 입문하였다.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6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권지성균관학유을 시작으로 학록·전적·호조좌랑·명천현감·충주목사·성균관사성을 거쳐 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오운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1552~1617]를 도와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으며, 이때 가족을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초곡(草谷)[지금의 영주시 조암동]으로 피신시킨다. 영천군의 초곡은 처가가 있는 곳으로 허사렴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맏사위였던 오운이 초곡에 있는 처가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전란의 와중에도 오운은 가족을 지킬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거주지를 초곡으로 옮기게 된다.
오운은 1593년 병으로 상주목사에 부임하지 않고 초곡으로 낙향하였다. 1595년 합천군수로 부임하였으며, 4월에는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사재(史才)를 인정받아 외직에 나가서도 사관을 겸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초곡에 거주하면서 김륵(金玏)[1540~1616]과 함께 이황을 향사한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일을 주도하였고, 따로 산천서당(山泉書堂)을 지어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600년(선조 33) 『퇴계집(退溪集)』이 간행되자, 문집고성제(文集告成祭)에 참여하여 여러 동문과 이황의 학문을 강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으며, 1616년 77세의 나이로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는데, 병환이 심해져 1617년 사직하고 초곡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오운은 함안군수로 재임 중 정구(鄭逑)[1543~1620]와 함께 『함주지(咸州誌)』를 편찬하였는데, 『함주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방 읍지이다. 1606년(선조 39)에는 8권 8책의 역사책인 『동사찬요(東史纂要)』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6권 3책의 『죽유집(竹牗集)』이 전한다.
[묘소]
[상훈과 추모]
오운은 1779년(정조 3)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가, 1786년(정조 10) 옛 산천서당 자리에 한천서원(寒泉書院)[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문정동]이 건립되면서, 한천서원으로 분안(分安)되었다. 한천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 때 철폐되었다. 1869년에는 남계사(南溪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