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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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仁行 |
영어공식명칭 | Lee In-haeng |
이칭/별칭 | 공택(公宅),신야(新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758년 - 이인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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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83년 - 이인행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90년 - 이인행 온릉참봉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93년 - 이인행 공릉참봉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93년 - 이인행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797년 - 이인행 의금부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00년 - 이인행 고산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01년 - 이인행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802년 - 이인행 위원군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03년 - 이인행 장연현 이배 |
활동 시기/일시 | 1805년 - 이인행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822년 - 이인행 익위사익위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833년 - 이인행 사망 |
출생지 | 이인행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 |
부임|활동지 | 이인행 부임지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
부임|활동지 | 이산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내림로 106-43 |
유배|이배지 | 이인행 유배지 - 평안북도 위원군 |
유배|이배지 | 이인행 이배지 - 황해도 장연군 |
묘소|단소 | 이인행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성(眞城) |
대표 관직 | 의금부도사|형조정랑|고산현감|익위사익위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이인행(李仁行)[1758~1833]은 생원시 급제 후 온릉참봉에 천거되었으며, 이후 의금부도사·형조정랑·고산현감·익위사익위 등을 지냈다.
[가계]
이인행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공택(公宅), 호는 신야(新野)이다. 아버지는 이관섭(李觀燮), 어머니는 이덕상(李德祥)의 딸 영천이씨(永川李氏), 할아버지는 이사덕(李師德), 증조할아버지는 이엽(李曅)이다. 부인은 정길(鄭桔)의 딸 숙인 청주정씨(淸州鄭氏)이다.
[활동 사항]
이인행은 1758년(영조 34)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신천리(新川里)[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790년 온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정조가 『중용(中庸)』으로서 책문을 내었는데, 초계문신의 답안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다시 문제를 내었다. 이때 정조는 성균관에 있던 이인행의 답안을 보고 흡족하여 온릉참봉에 제수하였고, 능재에서의 독서도 허용하였다. 1792년(정조 16) 공릉참봉에 제수되었고, 1792년 사도세자 추존 상소에 참여하였다. 이어 혜릉참봉·전생서봉사를 거쳐, 선공감가감역이 되었다.
이인행은 1793년 다시 공릉참봉이 되었는데, 이 무렵 안동부사 김이익(金履翼)[1743~1830]이 부세 문제로 고을의 한 선비를 장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장살 당한 선비의 아들이 상복을 입고 상경하여 정조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였지만, 김이익의 족친인 판윤 김문순(金文淳)[1744~1811]이 미리 알고 그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인행은 그 선비를 풀어주고 소송을 할 수 있게 조처하였는데, 이 일을 김문순이 고발하여 의금부에 갇히어 십여 일간 고초를 당하였다.
이인행은 1797년(정조 21)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헌부감찰·형조정랑·전생서판관 등에 제수되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고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부임지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수해를 대비하는 등 치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관찰사 김달순(金達淳)[1760~1806]과 갈등으로 파직당하였다.
1802년(순조 2) 강세륜(姜世綸)이 영남의 남인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상소문에서 강세륜은 “이인행은 이가환(李家煥)[1742~1801]에게 자취를 의탁하여 몸과 마음을 의지한 것처럼 여겼다”라고 고변하였다. 강세륜이 고변한 상소문 문제로 이인행은 위원군에 유배되었다. 1803년 조정에서 석방 논의가 있었으나, 김달순 등의 반대로 장연현으로 양이(量移)[유배지를 조금 편한 곳으로 옮기는 것]되었다. 1805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1808년(순조 8)과 1811년 이산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1822년(순조 22) 익위사익위에 제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인행의 문집으로 14권 7책의 『신야집(新野集)』이 전한다. 문집 가운데 「논고산사민문(論高山士民文)」은 고산현감 재임 중 천주교 등의 사학(邪學)을 경계하고, 향약 시행 등을 백성들에게 장려한 글이다. 또 「변비(邊備)」는 장연현 유배 생활 중 변방 방어의 중요성과 그 대책을 저술한 것이며, 「서천록(西遷錄)」은 1803년 1월부터 1805년 4월까지 유배 생활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이다.
[묘소]
이인행의 묘소는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