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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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末孫 |
영어공식명칭 | Jang Mal-son |
이칭/별칭 | 경윤(景胤),안양공(安襄公),연복군(延福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431년 - 장말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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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3년 - 장말손 생원시 및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59년 - 장말손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63년 - 장말손 승문원박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65년 - 장말손 함길도병마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67년 - 장말손 적개공신 2등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476년 - 장말손 시강원우부빈객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77년 - 장말손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479년 - 장말손 해주목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486년 - 장말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86년 - 장말손 추시 |
추모 시기/일시 | 1486년 - 장말손 이조판서 증직 |
출생지 | 장말손 출생지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
거주|이주지 | 장말손 이주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장말손 이주지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
부임|활동지 | 장말손 부임지 - 황해도 해주시 |
묘소|단소 | 장말손 묘소 -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본포리 산39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인동(仁同) |
대표 관직 | 연복군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문신.
[개설]
장말손(張末孫)[1431~1486]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현재 영주 지역에는 장말손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초상·유품·고문서 등이 전한다.
[가계]
장말손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경윤(景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지가주군사를 지낸 장전(張戩), 할아버지는 고려 말 문하부의 급사중을 지낸 장천서(張天敍), 아버지는 홍산현감을 지낸 장안량(張安良)이다. 어머니의 경우 묘갈명에는 부사 지을성(池乙城)의 딸 정부인 단양지씨(丹陽池氏)로 기록되어 있으며, 『문과방목』에는 고승안(高承顔)의 딸 제주고씨(濟州高氏)로 나타난다. 부인은 영의정 권중화(權仲和)[1322~1408]의 손자 권영신(權永愼)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원래 장말손 가문은 한양과 예천에 있었지만, 장말손의 손자 장응신(張應臣)[1490~1554]이 문경동(文敬仝)[1457~1521]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초곡[지금의 영주시 조암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장응신의 손자 장언상(張彦祥)[1529~1609]이 지금의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로 이주하였으며, 현재까지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장말손은 1453년(단종 1) 생원시·진사시에 연이어 급제하였다. 1459년(세조 5)에는 문과에 급제했는데, 김종직(金宗直)[1431~1492]과 동방(同榜)이다. 1462년 고향 인동현을 떠나 한양의 창동으로 이거 하였으며, 1463년(세조 9) 승문원박사를 거쳐 한성참군·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 등에 제수되었다. 1465년에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조정의 천거를 받아, 특별히 함길도병마도사로 부임하였으며, 도절제사 강순(康純)[1390~1468]의 휘하에서 북방의 근심거리였던 나하추[納哈出] 무리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장말손은 1467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좌랑과 예문관응교를 겸하던 중, 함길도 길주에서 이시애(李施愛)[?~1467]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북장군에 오른 강순을 보좌하여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움으로써,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1468년에는 함길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반란으로 어수선해진 함길도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장말손은 1470년(성종 1) 장악원부정에 올랐으며, 감조관을 맡아 예종의 능역(陵役)을 감독하였다. 1476년에는 공조참의·이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우부빈객에 올랐다. 1477년 예천군 화장[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으로 잠시 낙향하였다가, 1479년(성종 10) 해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사직 후에는 화장으로 돌아와 송설헌(松雪軒)을 짓고 은둔하였다.
[학문과 저술]
장말손의 행적을 엮은 3권 1책의 『송설헌실기(松雪軒實記)』가 전한다.
[묘소]
장말손의 묘소는 예천군 호명면 본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82년(성종 13) 조정에서 장말손을 연복군(延福君)에 봉하고 비를 세워 장말손의 공로를 현창하였다. 성종은 장말손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장의 문을 닫게 하고 국사를 보내어 묏자리를 잡게 하였으며, 이조판서로 증직한 뒤 ‘안양’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류이좌(柳台佐)[1763~1837]가 묘갈명, 이효순(李孝淳)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이후 후손들이 송설헌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로 이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