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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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敬仝 |
영어공식명칭 | Mun Gyeong-dong |
이칭/별칭 | 흠지(欽之),창계(滄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457년 - 문경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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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86년 - 문경동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86년 - 문경동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95년 - 문경동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08년 - 문경동 양산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12년 - 문경동 예천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문경동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521년 - 문경동 청풍군수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21년 - 문경동 사망 |
거주|이주지 | 문경동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
부임|활동지 | 문경동 부임지 - 경상남도 양산시 |
부임|활동지 | 문경동 부임지 - 경상북도 예천군 |
부임|활동지 | 문경동 부임지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
묘소|단소 | 문경동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산133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남평(南平) |
대표 관직 | 양산군수|사옹원정|청풍군수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문경동(文敬仝)[1457~1521]은 양산군수·사옹원정·청풍군수 등을 지낸 문신이다. 삼포왜란 때 왜적을 방어하였다.
[가계]
문경동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字)는 흠지(欽之), 호는 창계(滄溪)인데, 문경동의 문집인 『창계집(滄溪集)』에는 본관이 감천(甘泉)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전연사직장을 지낸 문속명(文續命), 어머니는 소윤을 지낸 진유경(秦有經)의 딸 풍기진씨(豊基秦氏), 할아버지는 안동판관을 지낸 문손관(文孫貫), 증조할아버지는 보성감무를 지낸 문숙기(文淑器)이다. 부인은 건공장군 황태손(黃兌孫)의 딸 평해황씨(平海黃氏)이다.
문경동은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초곡(草谷)[지금의 영주시 조암동 일대]에 거주하였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문경동의 가산은 사위와 외손들에 상속되었는데, 외손녀 김해허씨(金海許氏)가 이황(李滉)[1501~1570]의 첫 번째 부인이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황은 젊은 시절 처가가 있는 초곡에서 공부하였고, 문경동의 묘갈명을 쓰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문경동은 1486년(성종 17)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급제하였으며, 1495년(연산군 1)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비안현감·강원도도사·종부시첨정을 거쳐 1508년(중종 3) 양산군수로 부임하였다. 1510년 양산군수 재임 중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김현손(金賢孫) 등과 함께 왜적을 방어하였다. 1510년 성균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대간들이 시부만 능하고 경학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곧 체차되었다.
문경동은 1512년(중종 7) 예천군수로 부임하였고, 1515년 경상우도에서 시행된 소과의 시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과장에서 일부 유생들이 난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여, 1516년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521년(중종 16) 청풍군수로 부임하였으며, 1521년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문경동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창계집』이 전한다. 평소 시부로 명망이 높았던 만큼 문집에 수록된 글 중 상당수가 시문이다.
[묘소]
문경동의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산133에 있다.
[상훈과 추모]
문경동의 유허비는 영주시 조암동 초곡마을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