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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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俊良 |
영어공식명칭 | Hwang Jun-ryang |
이칭/별칭 | 금계(錦溪),중거(仲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17년 - 황준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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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37년 - 황준량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40년 - 황준량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45년 - 황준량 상주교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47년 - 황준량 홍문관박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47년 - 황준량 성균관전적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50년 - 황준량 병조좌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51년 - 황준량 경상도감군어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1년 - 황준량 신녕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57년 - 황준량 단양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60년 - 황준량 성주목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63년 - 황준량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78년 - 황준량 백학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690년 - 황준량 욱양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781년 - 금선정 건립 |
출생지 | 황준량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외가|처가 | 황준량 처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
부임|활동지 | 황준량 부임지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
부임|활동지 | 황준량 부임지 - 충청북도 단양군 |
부임|활동지 | 황준량 부임지 - 경상북도 성주군 |
묘소|단소 | 황준량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
묘소|단소 | 욱양단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사당|배향지 | 욱양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사당|배향지 | 백학서원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청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평해(平海) |
대표 관직 | 신녕현감|단양군수|성주목사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황준량(黃俊良)[1517~1563]은 신녕현감·단양군수·성주목사 등을 지낸 문신으로 이황(李滉)[1501~1570]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가계]
황준량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생원 황연(黃鋋)으로 순흥훈도를 지냈으며, 영천(榮川)에서 풍기로 옮겨온 평해황씨 입향조가 된다. 증조할아버지는 사온서주부를 지낸 황말손(黃末孫), 할아버지는 순릉참봉을 지낸 황효동(黃孝仝), 아버지는 의릉참봉을 지낸 황치(黃觶), 어머니는 교수를 지낸 황한필(黃漢弼)의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며, 부인은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아들 이문량(李文樑)[1498~1581]의 딸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자식이 없어서 아우 황수량(黃遂良)의 장남 황지환(黃之瑍)을 양자로 삼았다.
[활동 사항]
황준량은 1517년(중종 12)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 금계에서 태어났다. 1537년(중종 32) 생원시, 154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 상주교수, 1547년(명종 2) 홍문관박사, 1550년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벽불소(闢佛疏)를 올렸다. 1551년 경상도감군어사로 파견되었고, 1551년 신녕현감에 부임하였다. 재임 중 진휼에 힘썼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림으로써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또한, 학문 진흥을 위해 백학서당(白鶴書堂)을 창건하였다.
황준량은 1557년(명종 12)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단양은 여러 폐단으로 고을이 매우 빈궁한 상태였다. 이에 황준량은 「단양진폐소(丹陽陳幣疏)」를 올려 백성의 폐해가 되는 원인과 해결 방안을 조목별로 개진하였다. 그 결과 단양은 10년간 면세가 되는 특혜를 입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떠돌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이외에도 단양향교를 중수하고 우탁을 사당에 제향 하여 학풍 일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1560년에는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는데, 역시 학교의 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전임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세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중수하였으며, 오건(吳健)을 성주의 교관으로 삼아 교육을 주관케 했다. 그리고 고을 동쪽에 공곡서당(孔谷書堂), 팔거현에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웠다.
황준량은 노년이 되면 고향에 은거하기 위해 죽령 아래 금계에다가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지었다. 그러나 노년에 고향에 은거하고자 한 뜻을 이루기 전인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황준량은 이황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평소 이황은 황준량에 대하여 “처음 선생[이현보(李賢輔)]의 문하에서 공을 알게 되어 교유함이 깊고 가까워져서 어리석고 듣지 못한 것을 공으로 인해 깨우친 바가 많다”라고 하여 자신도 황준량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였다. 황준량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가지 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읽고 마지막에 주자서(朱子書)를 읽음으로써 깨달음이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문집으로는 14권 5책의 『금계집(錦溪集)』이 전한다.
[묘소]
황준량의 묘소는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의 마을회관 옆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66년(명종 21) 풍기 금계에 황준량이 퇴휴처로 삼기 위해 건립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금양정사를 완공한 후, 이황이 풍기군수 조완벽에게 완호해주길 청원하였다. 1678년(숙종 4)에는 신녕의 백학서원(白鶴書院)에 제향되었다. 백학서원은 신녕현감 시절 황준량이 건립하였던 백학서당의 터에 건립한 것이다.
1662년(현종 3) 금양정사 곁에 욱양서원(郁陽書院)[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을 건립하여 이황을 제향하였고, 1690년(숙종 16) 황준량을 추가로 제향하였다. 욱양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거된 후 욱양단소로 이어져왔다. 단소와 정사 앞쪽에는 1781년(정조 5) 풍기군수 이현일과 후손, 향인들이 황준량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금선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