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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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屹 |
영어공식명칭 | Im Heul |
이칭/별칭 | 탁이(卓爾),용담(龍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학자.
[개설]
임흘(任屹)[1557~1620]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옥서참봉, 동몽교관 등을 지냈다.
[가계]
임흘의 자는 탁이(卓爾), 호는 용담(龍潭),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수안군수를 지낸 임한(任漢), 증조할아버지는 소간공 임유겸(任由謙)[1456~1527], 할아버지는 함양군수를 지낸 임건(任楗), 아버지는 선무랑 임태신(任泰臣), 어머니는 현감을 지낸 금응종(琴應鍾)의 딸 봉화금씨이며, 부인은 이우(李堣)[1469~1517]의 증손녀이자, 첨정 이빙(李憑)[1520~1585]의 딸인 진성이씨(眞城李氏)이다.
[활동 사항]
임흘은 1557년(명종 12)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1587년 경상도 안동부 내성현 용담리로 이주하였다. 또한 영천군(榮川郡) 적덕[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냇가에 취교정(翠蛟亭)을 짓고 자연 속에서 소요하였다. 임흘은 박승임(朴承任)[1517~1586]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스승의 가르침에 감흥을 받고 「몽매기(夢寐記)」라는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이후에는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 되어 예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임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종개(柳宗介)[1558~1592],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김중청(金中淸)[1566~1629]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김해(金垓)[1555~1593], 곽재우(郭再祐)[1552~1617] 막하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의병 활동의 공으로 전옥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당쟁이 격화되자 이를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사직하였다. 광해군 연간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만년에는 거처를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로 옮겼다.
[학문과 저술]
임흘의 문집으로 『용담집(龍潭集)』이 전하며, 그 외 저서로는 『임란일기(壬亂日記)』, 『용담잡영(龍潭雜詠)』, 『금관록(金官錄)』 등이 있다.
[묘소]
임흘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용두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흘의 행장은 1786년(정조 10) 이급(李級)과 1790년 정범조(丁範祖)[1723~1801]가 지었으며, 1790년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묘지명을 지었다. 묘갈명은 이헌경(李獻慶)[1719~1791]이 지었다.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용담에 있던 취교정이 퇴락하자, 1990년 임흘이 만년을 보냈던 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새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