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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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琴達淵 |
영어공식명칭 | Geum Dal-y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4년 - 금달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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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금달연 이강년 의진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금달연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14년 - 금달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금달연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금달연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
거주|이주지 | 금달연 거주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
활동지 | 금달연 활동지 - 경상북도|강원도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김상태 의진 우군장 |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금달연(琴達淵)[1874~1914]은 순흥 지역에서 김낙임(金樂任) 등과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1907년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의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9년 순흥헌병분경소의 순사대에 체포되어 종신징역을 받고 옥사·순국하였다.
[가계]
금달연의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아버지는 금석주(琴錫周),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1874년 2월 25일 경상도 순흥도호부 하단곡리(下丹谷里)[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금달연은 일찍이 참봉을 지냈다. 그런 가운데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순흥의 김낙임과 더불어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1907년 금달연은 이강년 부대(李康秊部隊)의 중군장 김상태(金尙台)[1864~1912]와 함께 순흥의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각처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에 1907년 11월 3일 금달연은 단양에서 재차 기의한 이강년 부대에 합류하였다. 1907년 8월 제천에서 창의하여 도창의대장에 추대된 이강년은 충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문경으로 들어가 군비를 조달하며 활동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때 금달연은 김상태의 소개장을 가지고 김낙임과 함께 휘하의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이강년 부대에 합세하였다.
금달연은 1907년 11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이강년 부대의 별초종사(別抄從事)로써 영주·순흥·풍기를 중심으로 봉화·단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금달연은 이강년 부대의 종사부에서 각 지역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400~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공격하는 등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이후 일본군의 의병 진압이 광범하게 전개되면서 대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이강년이 1908년 7월 2일 청풍 작성전투(鵲城戰鬪)에서 체포되어, 1908년 10월 13일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렇게 이강년이 체포되자 금달연은 김상태와 함께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금달연은 중군호좌의병대장 김상태의 우군장(右軍長)으로 영주·단양 일대에서 군수품을 모으고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쳤다.
금달연은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총기를 휴대한 수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순흥군 내의 여러 동리에서 군수품을 수집에 주력하였다. 이에 1909년 1월 18일경 부하 2명과 함께 총칼을 휴대하고 순흥군 화천면 사제리(沙堤里)[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거주 이종복(李鍾蕧)을 찾아가 총기로 위협하여 8냥을 갹출하였다. 또 순흥군 화천면 화천리(花川里) 상림곡(上林谷)[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에 거주하는 장헌수(張憲洙)로부터 미 3석, 순흥군 죽내면 여근리(汝斤里)에 거주하는 안도영(安道永)으로부터 미 4두, 순흥군 단산면 오대리(五帶里)에 거주하는 권청교(權靑橋)로부터 벼 6석, 단산면 병산리(屛山里)에 거주하는 황재호(黃在鎬)로부터 의류 6건 및 미 6두 등을 군수품으로 수집하였다.
그 외 금달연은 1909년 3월 14일 약 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단양군 동면 장현리(獐峴里)의 산중에서 단양순사주재소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 2명, 한인 순사 2명과 약 3시간의 교전 끝에 총상 및 도상을 입히고 한인 순사 2명을 살해하였으며,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물품을 탈취하였다. 또 1909년 4월 20일에는 봉화 소천시장 부근에서 부하 15명을 거느리고 약 20분간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강원도로 넘어가기도 하였다. 이처럼 금달연은 영주·풍기·순흥·봉화 일원에서 경북 북부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군수품을 모집하였으며, 휘하의 의병 18~20명과 함께 일본 군경과 유격전을 펼쳤다.
하지만 금달연은 1909년 9월 21일 순흥군 단산면 지곡동(支谷洞)[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옥대리]에서 순흥헌병분경소의 순사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금달연은 강도살인죄로 기소되어, 1909년 10월 2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종신징역을 받아 복역하던 중, 1914년 10월 21일 옥사·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금달연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