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84 |
---|---|
한자 | 金忠守 |
영어음역 | Kim Chungsu |
이칭/별칭 | 창죽헌(倉竹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안성시 가현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서흥(瑞興). 자(字)는 여문(汝文), 호(號)는 창죽헌(倉竹軒)이다. 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 김린(金燐)이다.
[활동사항]
죽산부 양지현(陽智縣) 월노동(月老洞)[현재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서 태어났다. 1555년(명종 10) 6세 때 서당(書堂)에서 글을 깨우쳐 즉흥시를 지었으며,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그 슬픈 마음을 만사(晩詞)로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부친상을 당한 이후 모친인 한씨(韓氏)가 종창을 앓았는데 반년이 넘어도 효험이 없었는데, 의원이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하자 이를 시행하여 효험을 보았고 열성껏 봉양함으로써 주위에서 효자라 칭송이 자자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하여 10월 말경에 죽산(竹山) 청용산(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옥신리 경계)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倭將)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수차례 공격하여 적병 100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노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에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고, 마침내 일본군에 포위되어 분전하다 전사했다. 이때 아들 김함(金涵)도 김충수가 포위되어 곤경에 처하자 적진을 뚫고 들어와 부자가 합세하여 대항하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묘소]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산84-2[고삼호수로 141-30]에 서흥김씨(瑞興金氏) 삼강정문(三綱旌門)이 있다. 그것은 충신 김충수(金忠守)와 그 아들 김함(金涵)의 효행 및 열부의 행적을 담은 정문(旌門)으로, 경기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740년(영조 16)에 5대손 김대영(金大榮)과 7대손 김동현(金東賢)이 상계하여 삼강 정려(三綱旌閭)를 하사 받았고, 김충수에게는 봉헌대부 사헌부장령이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