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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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啓宇 |
영어음역 | Nam Gyeu |
이칭/별칭 | 영시(永詩),일소(逸少),일호(一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화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후기의 화가.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일소(逸少), 호는 일호(一濠), 초명은 영시(永詩). 숙종 연간의 문신 남구만(南九萬)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부사 남진화(南進和)이다. 부인은 심대항(沈大恒)의 딸인 청송(靑松)심씨[1808~1848]이다. 자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남주원(南周元), 남시본(南蓍本)이나, 남주원은 백부인 남영서(南永書)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딸은 반남(潘南)박씨인 박정수(朴鼎壽)에게 출가하였다.
[활동사항]
서울의 남촌(南村)에서 살았으며 벼슬은 종실과 외척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정3품의 도정(都正)을 지냈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는 1886년(고종 23)에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죽기 얼마 전 수직(壽職)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받았다고 한다.
나비를 특히 잘 그려 남나비[南胡蝶]라고 불리었으며, 평생 동안 나비와 꽃그림만을 즐겨 그려 많은 유작을 남겼다. 남계우의 나비 그림들은 곱고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공필(工筆)을 사용하였는 데, 특히 정확한 세필의 사실적 묘사에 남계우의 뛰어난 관찰력과 묘사력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나비 그림의 제일인자로 조선 말기의 사실적이면서도 장식성이 강한 화풍 진작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1890년(고종 27) 경기도 용인 화곡(花谷)[일명 꽃골로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화동]에서 죽었다.
[학문과 사상]
‘회니논쟁(懷尼論爭)’으로 인한 노소 분당에서 소론의 영수를 지낸 남구만의 영향을 받아 소론인 양주조씨, 문화류씨,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와 인척 및 교유를 지속하였다.
[저술 및 작품]
「화접도대련(花蝶圖對聯)」·「화접묘도(花蝶猫圖)」·「석화접도대련(石花蝶圖對聯)」·「추초군접도(秋草群蝶圖)」·「격선도(擊扇圖)」·「군접도(群蝶圖)」 등 많은 그림과 시문집인 『파담팔영(琶潭八詠)』·『전원팔영(田園八詠)』 그리고 비평문인 『고시비평(古詩批評)』 등이 전해오고 있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회동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