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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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怡 |
영어음역 | Nam I |
이칭/별칭 | 의산군/문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전기 용인 출신의 무신.
[개설]
기개와 호기의 대장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로 출생지가 분명하지 않으나, 『용인읍지(龍仁邑誌)』 ‘충효열 인물’ 조항 중에 “용기가 매우 뛰어났으며 이시애(李施愛)를 토벌, 건주위(建州衛)를 정복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어 용인 출신임을 가늠하게 한다.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태종의 부마인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고,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다.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이며,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고, 부인은 좌의정 권람(權擥)의 딸이다.
[활동사항]
1457년(세조 3)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명을 받아 포천(抱川)·영평(永平)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하였고, 북관(北關)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이 되어 난을 진압하였다.
군중에서 당상관에 초계(超階)되어 행부호군(行副護軍), 곧 행호군이 되었으며,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토벌한 공로로 이등군공(二等軍功)을 받았으며, 그 뒤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146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하였으며, 이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발탁되었다. 그해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 원상(院相) 세력에 의하여 구성군·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세력이 제거될 때, 병조판서에서 파직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이때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남이(南怡)의 옥사(獄事)’가 일어나고 국문 끝에 능지처사 당하였다.
[저술 및 작품]
남이의 작품집은 전하지 않으나 「북정가(北征歌)」라는 시조가 전하여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묘소]
묘역과 비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남이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