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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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文柱 |
영어음역 | Lee Munju |
이칭/별칭 | 이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광준 |
[정의]
조선 중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이질(而質).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책록된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이옥(李沃)이다.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이인기(李麟寄)이다. 아버지는 이명노(李明老)이고, 부인은 밀양박씨 박영신(朴榮臣)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문주는 인조반정 때 작은아버지 이중노(李重老)와 함께 참여하여 김류(金瑬) 등과의 연락을 도왔다. 그러나 반정공신을 책록할 때는 포함되지 못하였다. 1626년(인조 4)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지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호종(扈從)하고 돌아와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영덕현령(盈德縣令)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문경으로 올라와 관찰사 심연(沈演)과 함께 싸웠다. 1639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642년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를 거쳐 다음해 곡성현감(谷城縣監)이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 전생서주부(典牲暑主簿)가 되었는데, 어머니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1652년(효종 3) 다시 감찰이 되어 시무(時務)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얼마 뒤 봉산현감(鳳山縣監)이 되어 조세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그 뒤 평창군수(平昌郡守)·정선군수(旌善郡守)·안악군수(安岳郡守) 등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656년 11월에 ‘임금이 두렵게 생각하여야 될 열 가지’에 대하여 상소하여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묘소]
묘소와 묘갈(墓碣)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에 있다. 묘갈은 당시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인 김상정(金相定)이 짓고, 8대손 이학년(李學秊)이 글을 쓰고 전액(篆額)하였다.